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K-R&B 한 스푼
고현욱이라는 이름은 생소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이 가수의 대표곡인 '헤어지지 말자'를 들어보면 '아, 이 노래!'하고 무릎을 탁 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휘성, 거미, 빅마마, 박정현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2003년, 고현욱은 그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야심차게 등장한 신예 보컬리스트였다. 언뜻 박효신을 연상케 하는 깊이 있는 중저음의 음색이 애절함을 느끼게 하는, 그야말로 K-R&B에 최적화된 보컬이었다.
'헤어지지 말자'는 전형적인 한국형 R&B 발라드였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로 시작하여 감정을 점차 고조시켜 가는 구조인데, 브릿지 파트에서 터져나오는 팔세토(Falsetto) 창법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굵은 목소리를 가진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팔세토가 무척 곱게 나오는데, 이런 포인트는 마치 브라이언 맥나잇(Brian McKnight)을 떠오르게 만든다.
타이틀곡 '헤어지지 말자'가 워낙 잘 만들어진 곡이라 기대했는데, 앨범을 전체적으로 들어보면 다소 실망스럽다. 타이틀곡에만 지나치게 힘을 많이 준 느낌이랄까. 어쨌든 히트곡 하나만 나오면 된다는 심사였던 걸까. 어쩌면 당시 시장의 구조 자체가 앨범의 완성도보다는 큰 거 한 방을 가져다줄 수 있는 히트곡의 유무로 성패 여부가 결정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 같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프로듀서와 가수 사이의 관계는 명확한 갑-을 관계였을 것이므로, 앨범 제작 과정에서 가수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즉,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억지로 불러야 했던 상황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면 수익성을 포기하고 과감히 밀어붙이든지, 아니면 하기 싫은 노래를 억지로 한 100곡쯤 불러서 정규 앨범을 서너 장쯤 내고 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요즘엔 이런 구조가 많이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프로듀서들이 너무 잘한다. 어쩜 그렇게 멋진 기획을 하고, 그걸 진짜로 실행에 옮겨 제작해서 세상에 내보이기까지 한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가수들이 억지로 프로듀서들의 의견을 따르는 게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그들의 기획력을 믿고 저절로 '따르게 되는' 구조가 된 것이다. 프로듀서들이 가수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구조. 이게 요즘 K팝의 시스템이다. 많이 건강해진 것 같다.
잠시 여담으로 샜는데, 고현욱 같은 실력 있는 보컬리스트가 요즘 활동하지 않는 건 다소 아쉽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에 원 히트 원더로 그치게 되었는데, 다시금 이런 보컬리스트가 재조명되어서 좋은 프로듀서를 만나 제대로 된 앨범을 한 장쯤 더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