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복장 터트리는 어느 한량 오타쿠의 덕질썰
2천만 원어치 35마리 도마뱀과 사는
30대 모태솔로 독신녀
일단, 저는 애니멀 호더가 아니에요. 점잖게 크레스티드 게코(도마뱀의 일종) 매니아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한정된 자원 내에서 35마리 도마뱀을 애지중지 키우고 있고, 이놈들을 위해 투룸으로 이사까지 했거든요. 봉천동 원룸에 살던 가난한 직장인 주제에, 월세가 어마어마한 오피스텔로 이사했어요. 이놈들이 없었더라면 원룸이 좁게 느껴질 일도 없었을 거고, 이사 자체를 할 일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35마리 도마뱀이라는 게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한 마리 한 마리 케어하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몸값도 대단한 녀석들이거든요.
가장 저렴한 녀석은 4만 원이고, 제일 비싼 녀석은 270만 원이에요. 그 외에도 100만 원, 120만 원...... 제 글값보다도 비싸고, 가끔은 제 월급 수준인 놈들이죠. 이쯤 되면, 키우고 사는 게 아니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사실 이 브런치 북은 이 아이들을 위해 쓰여졌어요.
제 삶의 낙들이죠.
'찐'으로 혈통 있는 녀석들
제가 괜히 '매니아'라고 서두를 쓴 게 아니에요.
이 녀석들을 데려오겠답시고, 정말 전국 방방곡곡, 발품을 많이 팔았거든요.
35마리 중엔 아주 혈통이 대단한 녀석들도 있지요.
유명한 브리더의 도마뱀에 꽂혀서, 연차 쓰고 울산까지 내려가 그 녀석 새끼들을 데려 온 경우도 있어요. '라스푸틴'이라는 이름의 도마뱀인데, 번개가 치는 듯한 무늬가 아주 멋들어지죠. 볏도 근사하고, 몸집도 좋아요. 고놈 새끼들도 애비를 닮아서 번개를 입고 태어났어요. 저희 집에는 라스푸틴 새끼만 네 마리가 있는데, 다 무늬가 도장처럼 똑같죠.
또, 시커먼 녀석이 하나 있는데, 요 녀석 애비는 '사우론'이라는 유명한 도마뱀입니다. 요놈은 이제 170만 원짜리이고, 기왕 데려올 거 혈통 좋은 놈을 데려오고 싶어서 '검은 도마뱀 전문'으로 유명한 숍 사장님께 가장 좋은 놈 추천을 넣어 받았습니다.
제일 비싼 놈은 대단한 명가에서 데려온 놈입니다. 애초에 브리더급 메인 수컷을 데려오려고 행사장에 참여했어요. 메인 수컷이라는 건, 이제 우리 집 기둥을 뜻합니다. 대표 간판 수컷이죠. 딱, 집안값, 이름값을 합니다. 그물모양으로 촘촘한 무늬가 아주 도마뱀이 아니라 예술이죠.
그 밖에도 부산에서 유명한, 정말 우리나라 최고의 브리더라고 할 수 있는 '선주비원더'님 댁에서 온 아이, 이와 쌍벽을 이루는 흰색 도마뱀(릴리화이트)으로 유명한 '낭만사도'님 댁 아이, 트익할 명가 '티그리스' 출신 아아이, '크레수산' 댁 간판 장첸 베이비, 사당의 명가 '다이노마켓' 댁 인기수컷 '짱구' 베이비, 마찬가지로 흰색 도마뱀으로 유명한 미녀 브리더 '휘핑크림님' 댁 아이. 등등.
내 빚의 근원이자
내 삶의 빛들이여
제가 충격적인 이야기 하나를 할게요. 사실 얘네들, 대출받아서 산 놈들입니다.
미친 거죠.
그런데, 어쩌다 대출까지 받아서 도마뱀 35마리를 키우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좀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인간이 뭔가에 미칠 때에는, 그만한 정황이 있는 법이거든요.
정말 이거 아니면 안 되는 순간.
이 도마뱀들이 아니면,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삶의 순간이 있었어요.
이 사연은, 제가 현재 준비하는 에세이집에 실려 있습니다. 제 인생이 늘 그렇지만, 정말, 딱하고도 가엾은 사정이죠.
에세이집의 첫 챕터가 바로 도마뱀 녀석들 이야기입니다. 원래는 이놈들 이야기만으로 한 권을 쓰려고 했는데, 어째 저째하다 보니 한 챕터로 줄어들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 챕터만으로는 이 녀석들 이야기를 끝낼 수가 없어요. 정말 할 말이 많거든요. 35마리마다 제각기 담긴 이야기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아무튼 웃깁니다.
요 조막만 한 놈들이. 내 빚의 근원이자, 내 인생의 빛이라는 사실이.
퇴근 후 “이놈들아! 주인님 왔다!” 하고 소리치는 게, 일종의 세레머니에요. 그러면 몇몇 놈들은 은신처에서 기어 나옵니다. 인간이 왔나 싶어서. 또는 얄미운 인간 놈 손가락 깨물어 주려고.
3일에 한 번씩 35 도마뱀분의 밥을 주고, 매일 저녁 분무기로 물을 뿌려 줍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간식인 귀뚜라미 데이죠. 이놈들 밥 주는 날은 야근을 못 해요. 밥 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니까.
그 잠깐은 회사 생활도 잊고, 내 삶도 잊고. 그렇다 보니 하나하나 작은 쉼표 같기도 하고.
이 브런치북은
어느 모태솔로 30대 미혼 여성 오타쿠의
인생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이렇게 미쳐 있는 게 도마뱀뿐만은 아니에요. 시즌마다 덕질하는 주제가 다르거든요.
인형에 빠질 때도 있고, 옥에 빠질 때도 있고, 유색보석에 빠질 때도 있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질 때도 있고, 로리타 드레스에 빠질 때도 있고, 코스프레를 했던 적도 있고, 게임에 돈을 탕진한 적도 있고, 자전거에 빠지질 않나, 그림을 그린 적이 있질 않나, 탱고는 늘 빠져 있죠. 좌우간 그렇습니다.
모태솔로 30대 미혼 여성이라는 건, 돈은 좀 있는 반면, 보통은 딱히 할 일이 없거든요.
그렇다 보니 이것저것 안 깔짝거린 데가 없는 ‘취미부자’가 되고, 쓸데없는 잡지식만 쌓여 갑니다.
사윗감도 안 데려오는 장녀가 돈만 펑펑 쓰고 다니니, 이제 부모님 복장은 터지시죠. 여동생은 내심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사나' 싶을 겁니다. 이 사실을 되새길 때면 죄책감도 느껴지지만, 그 또한 어쩌겠습니까. 저라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건 아닌데, 그, 다, 뭐, 어쩌다 보니.
지금부터 하나하나 덕질썰을 풀어보겠습니다.
읽다 보면, ‘세상에 이런 짓도 하나’ ‘참 쓸데없다’ ‘이 여자는 제정신인가?’ 싶으실 거예요.
읽다 보면, 어이없고,
읽고 나면, 왠지 짠하고.
결국엔 조금 웃기고, 이상하게 따뜻한 이야기.
한번 같이 읽어주세요. 남의 인생, 엿보면 재밌잖아요.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