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3 아들의 방학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시댁을 간다. 아이가 어렸을 때 1년 정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봐주시기도 했고, 당신들에게는 첫 손주라 그 관계가 돈독하고 사랑이 넘친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거의 주말마다 할아버지댁에 가서 하룻밤씩 자고 왔지만 이제는 방학을 해야만 자고 올 수 있는 일정을 만들 수 있다. 아이에게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방문이고 나에게도 언제나 정겨운 시댁이다.
한 달 반 만에 간 시댁이다. 언제나처럼 아버님이 우리를 마중 나와 계신다. 남편 없이 아이와 단 둘이 가도 편안하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아파트가 아닌 2층 단독 주택이라 너무나 좋다. 마당에는 '초롱'이라는 이름의 6살짜리 강아지가 우리를 반겨준다. 아버님 말씀으로는 차 소리만 들어도 우리가 왔는지 다 안다고 하는데 정말인 것 같다. 오랜만에 본 초롱이가 우리를 너무나 좋아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천재견 초롱이, 오늘따라 눈빛이 아련하다.
아버님이 예쁘게 가꿔놓으신 화단이 있는 마당에서 초롱이의 배를 한창 만져주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어머님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 며느리 왔어?'라며 반가워하신다. 한창 음식을 만들고 계셔도 서둘러 나오셔서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신다. 그렇다. 나는 사랑받는 며느리다. 사랑한다는 말씀은 직접 하시지 않아도 나는 시댁을 다녀갈 때마다 온몸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온다. 이 날도 손자와 며느리를 위한 저녁상을 푸짐하게 차리신다. 삼겹살주꾸미 볶음과 시원한 콩나물국, 다양한 쌈 채소, 오이 무침, 계란말이 등 시댁 근처의 5일 장에서 장 본 것으로 차리신 상이 진수성찬이다. 오랜만에 할머니 밥을 먹는 우리 아들도 금세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낸다.
"어머님, 고춧가루 있어요?"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생각나서 어머님께 물어본다.
"당연히 있지. 고춧가루는 빛을 보면 안 된다잉." 어머님이 신문지로 돌돌 말린 고춧가루가 들어있는 페트병을 김치냉장고 속의 김치통에서 빼주신다.
"맞아요, 어머님. 그래서 저는 고춧가루 냉동실에 넣어두고 먹어요."
"이번에 들깻가루 팔았는디(샀는디) 좀 줄까?"
"네, 주세요. 우리 집 들깻가루 많이 먹잖아요." 미역국에 넣어도 맛있고 온갖 나물 반찬에 넣어 먹으면 고소한 맛이 배가 되는 들깻가루도 야무지게 챙긴다.
"이것도 꼭 냉동실에 넣어두고 먹어라잉! 또 필요한 건 없냐? 묵은지는 안 떨어졌고?"
"묵은지는 아직 남아서 다음에 가져갈게요." 김치 냉장고가 없는 우리 집은 필요할 때마다 김치를 어머님댁에서 가져다 먹는다.
"천도복숭아 있는데 좀 싸줄까?"
"네, 어머님. 자두는 없어요?"
"내일 OO아빠가 OO이 데리러 올 때 사서 보낼게잉."
배는 부르지만 맛있는 어머님의 밥상을 쉽게 포기하지 못해 열심히 먹으며 어머님께 이것저것 편하게 요구를 한다.
저녁을 다 먹었지만 나는 설거지 대신 소파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어머님이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하나 건네주신다. 요즘에 살이 많이 쪄서 먹으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어느새 내 손은 막대 아이스크림의 봉지를 뜯고 있다. 사실 시댁에서 설거지를 한 기억이 손에 꼽는다. 어머님이 하시거나 남편이 주로 설거지를 한다. 밥을 천천히 먹는 나는 먹고 나서도 어머님이 챙겨주시는 과일 같은 후식을 가지고 텔레비전 앞에 앉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언제나 며느리를 귀하게 생각하시고, 애도 보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진심으로 말씀도 해주신다. 어머님과 아버님의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고 있음을 매번 느낀다.
우리 시부모님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선하신 분들이다. 정말 법 없이도 사실 분들이다. 남편복, 자식복, 부모님 복도 가지고 있는(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다) 내가 가진 제일 큰 복은 시부모님 복인 것 같다. 평소 전화도 잘 안 드리고, 잘 챙겨드리지 못하는데 항상 자식과 손주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모든 걸 다 내어주시는 분들이다.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해서 이런 시부모님을 만났을지 정말로 가슴이 벅찰 때가 많다.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항상 존중해 주시고 현재를 즐겁게 살라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신다. 가끔 내가 공부에 재능이 없는 아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쉴 때는 '몸만 건강하고 인성만 좋으면 다 잘 자랄 수 있다'라고 격려도 아끼지 않으신다.
다음 날 아이를 데리고 온 남편이 복숭아 한 상자, 자두 한 상자, 수박 한 통 그리고 맛있게 쪄진 찰옥수수를 힘들게 식탁으로 옮긴다. 어머님께 말씀드린 건 자두 한 상자였을 뿐인데 과일을 좋아하는 며느리를 생각해서 이렇게나 많이 보내셨다. 우리 집 남자들은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입에 넣어줘야 겨우 먹는 스타일이다. 과일값이 많이 드는 우리 집에서 과일을 즐겨하는 건 나뿐이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로 나 자신을 위해 과일을 직접 준비한다. 더불어 제일 맛있고 예쁜 부분은 항상 내 차지이다. 며느리를 생각해 시장에서 좋은 것으로 과일을 고르고 사서 보냈을 시부모님을 생각하니 정말로 감사하다. 세상에서 제일 선하신 우리 시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간절히 바란다.
어머님, 아버님! 감사합니다.
과일 먹고 더 예뻐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