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 마을에 봄이 오면 첫사랑도 함께 온 다고 했다.
은어 마을에 봄이 오면 사랑도 함께 온 다고 했었다.
1990년대 어느 해 봄....
아침 7시 30분에 떠나는 비둘기호 열차
운혁은 오늘도 기차에 올랐다.
7시 30분 기차는 일명 통학 열차로 불리는 기차였다.
아침마다 전주나 익산으로 학생들과 직장인들을 태우고
구례 곡성 남원 임실을 지나 전주역에 사람들을 가득 내려놓고 나서는
삼례 익산까지 가고 나서야 멈추었다.
운혁은 매일 남원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면 곡성인지 구례인지 어디서 탔는지 모르지만
그의 맘에 꼭 드는 여학생이 있었다.
전주역에 내리면 그 여학생도 기차에서 내렸다.
역 앞에서 버스를 타며 같은 대학교 앞에 그녀도 내렸다.
몇 번이나 말을 걸까 했지만 운혁은 말을 건네지 못했다.
늘 함께 다니던 남학생과 여학생들 무리 속에 그녀가 있었다.
그렇게 봄이 지났다.
운혁은 아직까지 그녀에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겨우 알아낸 것이 그녀의 이름과 다니던 과 정도였다.
"김윤희" 그녀의 이름이었다.
[섬진강]
윤희는 구례에 살았다.
구례에서 새벽 6시 30분 기차를 타고 전주까지 매일 왕복했다.
자취하고 싶었지만, 윤희의 완강한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윤희의 마을은 섬진강 지척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섬진강 다리를 건너 구례구역에서 기차를 탄다.
여수에서 새벽에 출발한 기차는 여수 순천을 지나 구례구역을 지나 암록에서 잠시 정차했다가
곡성을 지나 남원을 지난다.
윤희는 며칠 전부터 자기를 지켜보는 운혁이 눈에 들어왔다.
누굴 까?
윤희는 운혁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좋았다.
어려서 윤희는 예쁘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엄했고 어머니는 늘 윤희에게 야박했다.
언니나 남동생에게는 친절했던 엄마는 윤희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윤희야.. 너는 야무지니까 알아서 잘하잔여"
언니는 감프고 동생은 아직 에리고 우리 집에 하나 밖에 없는 남자아이 아니냐...
니는 알아서 잘하잖여...
윤희는 엄마가 “넌 알아서 잘하는 아이”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나도 관심받고 싶은데..." 윤희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넌 알아서.. 잘하잖아....다음으로 나오는 레퍼토리를 다시 듣고 싶지 않아 윤희는 꾹 참았다.
[동해마을 벚꽃 길]
윤희는 운혁의 눈빛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윤희는 멀리도 가까이도 있지 않고 서너 걸음 건너서
매일 자신을 지켜보는 운혁이 왜 싫지 않은 지 알 수 없었다.
운혁은 함께 기차를 타는 친구들에게 윤희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라면서 절대 너희들은 끼어들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아무도 윤희에게 관심이 없었다.
윤희랑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 훨씬 예뻤기 때문이다.
" 야 너는 눈알이 없냐?"
" 옆에 있는 친구들이 훨씬 예쁜데" 하지만 운혁은 윤희가 가장 예뻐 보였다.
“오늘은 윤희가 안 보이네….”
운혁이 기차를 탔을 때 윤희가 보이지 않았다.
매번 같은 기차를 탔던 윤희가 안 보이는 것이 운혁은 불안했다.
운혁은 한 칸 한 칸 찾아봤지만, 윤희는 없었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만큼 운혁의 마음도 요동쳤다.
전주역에서 내려 다시 찾아봤지만 역시 윤희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왜 윤희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윤희의 친구들에게 물어볼까?
내가 그런 자격이 있을까?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윤희가 기차를 타지 않는지, 일주일이 지나자
운혁은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혹시 윤희씨가 왜 기차를 타지 않는지 아시나요?
운혁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 그분이군요?”
“매일 기차 타면 윤희를 보고 있던 분….”
친구들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
“저희도 윤희가 왜 기차를 안 탔는지는 모르겠어요.”
“야 너희들 윤희 연락처 알아?”
“모르는데”
친구들은 한 마디씩 했지만 딱히 윤희의 연락처를 아는 친구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들은 곡성에 살았고 윤희만 구례에 산다고 했다.
“ 윤희가 사는 마을 이름은 알아요.”
“이름이 특이하더라고요.”
“섬진강가에 동해마을이라고 했어요.”
“ 구례에 동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죠!”
“그러네요. 섬진강에 동해 마을이라니….”
다음날도 윤희는 기차에 타지 않았다.
운혁은 토요일에 동해마을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지도에서 살펴보니 동해마을은 구례구역에서 멀지 않았다.
“구례구역에 내려 걸어가면 되겠구나…” 운혁은 생각했다.
토요일 아침
운혁은 난생처음으로 전주가 아닌 여수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곡성과 압록을 거쳐 구례구역에 운혁을 내려주고 다시 여수로 향했다.
“이제 걸어가면 되겠구나….”
운혁은 섬진강을 따라서 걸었다.
정오의 태양이 뜨겁게 운혁의 머리 위를 비추었다.
강물은 구례구역으로 들어도 크게 방향을 틀더니 북쪽으로 향했다.
북쪽을 보니 어슴푸레 노고단이 보였다
노고단에서 구례 쪽을 봤을 때 굽이굽이 흐르던 섬진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구비 어딘 가에 “윤희가 살고 있었구나”라고 운혁은 생각했다.
운혁이 동해 마을로 걷기 시작 한지 20여분이 지났을 때
강가에 낚시하는 사람이 보였다.
“아저씨 뭐 잡는 거예요?”
“어… 은어도 잡고 쏘가리도 잡고, 빠가사리나 붕어도 잡고, 허지….”
“아이고…. 날이 뜨거우니까, 물고기도 안 잡히네 잉,
"이제 들어가야겠구먼….”
“대학생인가 보네?”
“여그서는 못 보던 학생인데….”
“네. “
“근데 어디 가는 거여?”
“저요”
“동해마을요.”
“잉.”
“동해마을은 왜?”
“뭐…., 여행요.”
“그려…..”
“그 동네에 여행 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잉”
“지리산이나 화엄사나 피아골로 가야지…. 우리 마을에 뭐 볼 게 있다고…. “
“날도 요로코롬 더운데….”
“네….”
“이름이 특이해서 한 번 가보려고요.”
“그려, 우리 마을 이름이 좀 특이하기는 허지…’.
“아. 아저씨 동해마을에 사세요?”
“그려…. 내가 그 마을에 살아….”
“나.... 낚시 다 했는데 태워다 줄까?”
“잠깐만 기둘러봐…..”
중태는 서둘러 낚시채비를 정리했다.
낚시채비라고 해봐야 대나무 장대 하나에 낚시 줄, 그리고 봉돌 몇 개와 지렁이, 그리고 양동이 하나가 다였다. 양은 양동이엔 은어 몇 마리와 피라미 그리고 붕어 한 두 마리가 숨이 차는지 뻐끔뻐끔 가쁜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자… 뒤에 타잉"
운혁은 중태의 갑작스러운 말에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한 손에 양동이를 들고 오토바이 뒤에 앉았다.
“고마워요.”
오토바이는 부르릉~~~ 시동에 걸리자 무섭게 출발했다.
“꽉 잡어잉….”
“네, 아저씨!”
오토바이가 회전할 때마다 양동이 물이 찰랑거렸다.
그때마다 물고기들이 파도에 휩쓸리는 것 마냥 이리저리 흔들렸다.
출발한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오토바이는 멈추었다.
“여그가 동해 마을이여"
동해 마을 입구에는 어느 시골 마을처럼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무문정이라는 정자가 보였다.
모기가 없는 마을라는 뜻이라는 푯말이 보였다.
"정심때가 다 되어 부럿네"
밥 먹을 데는 있고?
찾아봐야죠.
여긴 식당도 없는데.."
구례읍까지는 가야 식당이 있을 것인데....
여기서 걸어가려면 10리도 넘을 것이고,
이 동네는 버스도 하루에 네 번 뿐인데 잉…
버스 시간도 한 참 남았고….
이것도 인연이니 우리 집에서 정심 밥 먹고 가...
아니.. 그렇게 까지요.... 미안해서..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운혁을 태운 오토바이는 동해마을 골목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여가 우리 집이여 잉....
잠깐 여기서 기둘러
운혁은 오토바이에서 내려 어정쩡하게 대문 입구에 서 있었다.
김중태..라는 명패가 보였다.
김중태! 김윤희!... 같은 성씨인데...
어이.. 학생 어여 들어와..
운혁은 마당 한가운데 평상에 엉거주춤 앉았다.
마당에 커다란 감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곧이어 중태의 처 지순이 상을 차려 나왔다.
감자와 열무김치, 박나물, 풋고추 그리고 다슬기를 넣은 된장국이었다.
학생 찬은 없지만, 잘 먹어요.
아..
네..
너무 죄송해요.
이렇게 갑자기....
운혁이 평상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윤희는 며칠 몸이 아파 학교에 가지 못했다.
윤희는 이상하게 몸이 피곤하고 숨이 가쁘고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평생 아픈 적이 없던 튼튼한 윤희였다.
“왜 갑자기 아픈 것일까?”
지난번 아빠와 광주 병원에 갔을 때
며칠 쉬면 좋아질 것이라는 아빠 말을 듣고 윤희는 안심했다.
“며칠 쉬면 좋아지겠지..”라고 윤희는 맘을 다스렸지만 며칠이 열흘이 되어도 여전히 숨이 찼다.
방 안에서 열린 문틈으로 평상을 보고 윤희는 깜짝 놀랐다.
기차에서 보던 남학생이 평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니..
저 학생이 여기 왜 있어요?
어.. 니그 아빠가 길에서 우여찮게 만났는데 우리 마을을 찾고 있어 데려왔다는데...
여기 정심밥 먹을 때가 없다고, 아빠가 점심 먹고 가라고 했다더라...
근데.. 너 저 학생 알아?
아.. 그게..
통학 기차에 저 학생이 하더라고요.
같은 학교에서 내리기도 하고..
“그래서? “
더는 잘 몰라요. 윤희는 가쁜 숨이 더 차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 그랬구나....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러니… 좀 숨이 차서..
윤희아빠...
왜..
"그 학생 윤희가 아는 학생이라는데요!
엄마!!!
조용히 좀 해요. 엄마는 참…
그렇게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어떡해요.
그려..
그럼 윤희 너도 나와서 밥 먹어라..
아니어요."
저는 여기가 편해요.
윤희는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이런 차림으로 운혁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부스스한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야.. 아빠가 나오라면 나오지 무슨 핑계가 그렇게 많아..
아빠의 호통에 윤희는 겨우 거울에서 머리를 매 만지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이 학생..
내 딸이.
자네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데..
아.. 그래요...
운혁은 애써 모르는 척했다.
안녕하세요.
저.. 이운혁이라고 합니다.
아… 네. 저는 김윤희라고 해요.
윤희와 운혁은 얼떨결에 통성명하게 되었다.
윤희는 겨우 몇 숟가락 먹다 수저를 놓았다.
운혁은 윤희의 어머니가 해준 반찬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운혁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학생이 시장했나 보네.. 반찬이 맛있어요. 아주머니…
윤희야 밥 먹었으면 저 학생 동네 구경 좀 시켜줘라.
우리 마을에 오고 싶어서 남원에서 왔다는데.. 중태는 윤희에서 말했다.
동네라고 연탄구멍만큼 작아 구경시켜 줄 것도 없는데 무슨 동네구경을요.…
윤희의 엄마 지순은 못 마땅한 듯 말했다.
야.. 어여 갔다 와
시방 거기서 뭐 하냐
어거 가지 나가지 않고...
윤희는 마지못해 운혁과 함께 파란 대문을 열고 마당 밖으로 나갔다.
여보!! 아니 젊은 남학생이랑 우리 윤희를 함께 보내면 어떻게 해요.
아니! 젊으니까 보내지 늙은 놈 이랑 보낼까?
윤희가 자취한다고 했을 때 엄청 반대했잖아요.
그것은... 그거고..
김중태는 담배를 피워 물고는 별말 없이 하늘에 구름만 쳐다봤다.
아니 저 남학생 인물도 좋고 학교도 좋고....
우리 윤희가 연애라도 한 번 해봐야 할 것 아니가….
중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둘이 사귀면 좋을 것 같은데..
이 양반이 별소리 다 하시네…
지순은 중태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통 이해가 안 되었다.
윤희와 운혁은 섬진강을 따라 걸었다.
"여기는 뭐 하러 오셨어요?"
"네.. 그냥 섬진강이 보고 싶어 서요"
"이 동네가 예쁘다고 친구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어떤 친구들이요?"
"함께 기차 타던 친구들 있잖아요"
"아.. 그 친구들요"
"네"
윤희와 운혁은 길게 늘어선
벚나무 그늘로 뒤덮인 도로를 말이 없이 걸었다.
멀리 구례읍과 문척면을 잊는 문척교가 보였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다리예요.” 윤희는 문척교를 가리켰다.
낮게 깔린 다리가 보였다.
그러게요. 다리가 낮아서 좋아 보여요.
윤희는 구례읍으로 학교 다닐 때 자전거를 타고 매일
저 다리를 건너 다녔던 기억이 낮다.
친구들과 함께 떠들던 기억 홍수가 나서
다리를 건너지 못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런 날이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진짜 저희 마을엔 왜 오신 거예요? 윤희가 다시 물었다.
"사실은…..
윤희 씨가 요즘 기차에 타지 않아 궁금해서 왔어요. 운혁이 말했다.
아니.. 제가 기차를 안 타는 게 왜 궁금하죠?"
그렇게 묻고는 너무 심해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 니. 그게.. 그냥 신경이 쓰여 서요"
"아무튼 이렇게 봤으니 가볼게요."
"불쑥 찾아와서 정말 미안해요""
아.. “네….. 잘 가세요"
“아저씨랑 아주머니께는 고맙다고 대신 전해 주세요.”
운혁은 서둘러 구례읍으로 걷기 시작했다.
윤희는 운혁이 문척교를 건너는 것을 지켜봤다.
윤희는 다리를 힘없이 걷는 운혁의 뒷모습이 애잔해 보였다.
무슨 이유일까? 저 남자는 여기까지 뭐 때문에 왔을까?
윤희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집에 들어와서 중태가 운혁에 대해서 물었지만, 윤희는 별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에도 윤희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 주에 다시 가봐야 하나....
운혁은 힘이 없어 보이던 윤희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동해마을에서 잠시 윤희의 얼굴을 봤을 때 윤희의 얼굴을
눈처럼 창백했기 때문이다.
"별일 없겠지..."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운혁은 다시 구례를 찾아갔다.
한여름의 아스팔트는 뜨겁게 이글거렸다.
멀리 동해 마을이 보였다.
섬진강은 얼마 전에 내린 폭우로 인해 잔뜩 크기를 키워 넘실거렸다.
운혁은 동해마을에 도착했다.
윤희의 집에 찾아가 보니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운혁은 마을로 다시 걸어 내려왔다.
동네 사람들이 넘실 거리는 강물을 보며 담배를 연신 피우고 있었다.
“이번 비는 징하게 오더만 잉”
“강물이 저렇게 여그까정 넘실 거리는 것도 징허게 오랜만일세”
“문척다리는 진작에 안 보이드만….”
마을 사람들은 이번 장맛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잉"
“누구여?”
"김중태 아저씨 집에 찾아왔는데 집에 안 보여서요"
중태네…. 벌써 이사 가버렸는디....
어디로요.
모르겠네.. 광주로 간다고 했지.
자세히 는 우덜도 모르고
하도 갑작시럽게 가버려서…
여그 이사 올 때도 갑자기 오드만 갈 때도 그렇게 가버리는 구만.
아.. 네...
운혁은 다시 기차에 올랐다.
여름 방학이 끝났다.
역시 윤희는 보이지 않았다
윤희의 친구들에게 물었지만, 친구들도 이사를 했다는 것 이외에는 윤희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운혁은 대학에 졸업하고 중소기업 회사원으로 20년을 보냈다.
매년 마음이 허전하고 힘들 때는 지리산에 올랐다.
노고단에 올라가면 멀리 윤희가 살던 마을이 어슴프레 보였다.
그때 그 시절 스무 살의 윤희를 떠올리며 마음이 아련하게 아파졌다.
운혁은 몇 번 여자를 만났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상하게 다른 여자를 만나면 윤희가 떠올라서 오래가지 못했다.
못다 한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다시 못 봐서일까?
윤희는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일까?
운혁은 윤희라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이후 그날 여름에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운혁은 그 이후에도 동해 마을에 여러 번 가봤지만, 윤희의 흔적은 없었다.
윤희네는 반냇골에서 이사를 왔다고 한다.
몇 마지기 안 되는 땅에 농사를 짓고
겨울엔 순천에서 중태가 품을 팔아서 먹고살았다고 했다.
윤희의 아버지는 자신의 둘째 딸이 대학에 들어가자
더 열심히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그런 둘째 딸이 병으로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대학을 그만두고 나자 윤희가 입원에 있는 광주 병원 근처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윤희는 심장이 아팠다. 2년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다행히 몸이 좋아졌지만, 윤희의 병 때문에 아버지는 구례의 땅을 모두 팔고 광주에서 날일을 나가야 했고 엄마는 식당 일을 해야 했다. 언니는 공장에서 일했다. 남동생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20년이 지났고 다시는 구례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사이 윤희의 엄마 아빠 모두 돌아가셨다.
윤희는 작은 회사 사무실에 경리로 일하다가 함께 일하던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 생활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해 여름 시작하는 때 운혁이 자기 집 앞마당에 들어섰을 때가 생각났다.
세살문 사이로 보이던 운혁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날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친절하게 이야기할 것을 윤희는 후회가 되었다.
난생처음으로 이유 없이 보고 싶었던 사람,
운혁이 기차에서 자기가 탄 곳으로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윤희를 지켜보던 운혁의 따스한 눈길이 생각났다.
우리 마을까지 찾아왔었는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윤희는 여름이 오면 매번 그날이 떠 올랐다.
섬진강에 맑은 물과,
눈 쌓인 노고단, 기
차를 타기 위해 걷던 섬진강 길,
아버지와 함께 타던 오토바이 그러렁 거리는 소리,
윤희야 잘 잡아라 잉.. 하고 말하던 젊은 아버지의 등에서 느껴지던 온기,
모든 것이 윤희의 마음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추억 속에 깊은 곳에 담겨 있을 뿐이었다.
[구례 문척교]
오래전 병이 호전되고 나서 윤희는 운혁을 찾은 적이 있었다.
대학로 앞 서점 안에 운혁이 있었다.
전공서적을 읽고 있는 운혁을 보니 자신의 처지도 그렇고
옆에 있는 여학생을 보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갔지만, 윤희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그렇게 20년을 흘렀다. 윤희의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정에 약했다.
친구들의 빚보증에 IMF로 회사가 넘어갔다. 한 번 기울어진 살림은 일어서지 못했다.
더구나 하나뿐인 딸은 지적장애가 있었다. 윤희의 인생에는 빛은 없는 암흙뿐이었다.
오직 남편이 남겨둔 빚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 남편 빚 때문에 위장 이혼을 해야 했다.
남편은 신용불량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윤희가 광주에서 구례를 이사를 온 것은 5년 전이었다.
남편과는 가끔 연락했지만, 점점 소식이 없었다.
윤희도 이편이 편했다.
구례 봉서리의 작고 오래된 집에서 윤희와 윤희의 딸 서진이 함께 살았다.
윤희는 구례읍에 작은 반찬가게를 열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엄마를 닮아 윤희는 음식을 곧잘 했다.
구례읍에 반찬가게가 없어서인지 장사는 그럭저럭 되었다.
운혁은 가끔 구례에 찾았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구례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터미널을 걷고 있는 윤희와 비슷한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날 윤희는 광주에서 구례로 내려왔다.
윤희도 구례 버스터미널에서 운혁과 비슷한 남자를 봤다.
20년 전의 운혁을 생각했을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지만,
운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혁은 윤희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그때의 모습이 아니지만, 운혁은 윤희가 옛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운혁의 가슴이 스무 살 그때처럼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렸을 때 윤희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운혁은 구례읍을 몇 바퀴를 돌았지만,
윤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5년이 지났다.
운혁은 시간이 생길 때마다 자석에 이끌리듯 구례를 찾았다.
윤희가 좋아했던 문척교를 매번 걸었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다리를 건넜다.
다리 건너서 걷다 보면 벚꽃길이 나왔다. 운혁은 매번 벚꽃이 피면 동해마을까지 걸었다.
그 꽂길 어딘 가에 윤희에 흔적이 있을 것 같았다.
“윤희도 이 길을 사랑했겠지.” 자전거를 타고 벚꽃길을 달리는 윤희의 젊은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함께 걸었던 그 여름날의 벚나무 길도 좋았다. 하지만 윤희를 찾을 수 없었다.
운혁은 윤희를 찾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5년 전 윤희를 봤을 때 옆에 윤희를 닮은 여자아이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세월이 흘렀다.
운혁은 여전히 구례 읍에 자주 찾았지만, 이제 더 이상 윤희를 찾지 않았다.
운혁은 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췌장에 암이 있다는 선고를 받았다.
운혁에게 남은 삶은 고작 6개월에서 1년이라고 의사는 짧게 말했다.
운혁은 치료를 거부했다.
남은 삶은 구례에서 보내고 싶어 운혁은 퇴사하고 구례에 내려왔다.
햇빛이 잘 비치는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구례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반찬가게에서 윤희를 봤다.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윤희를 운혁은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반찬가게에 운혁이 들어왔을 때 윤희는 운혁을 바로 알아봤다.
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아는 척할 수가 없었다.
이혼을 했지만 남편이 있었고, 장애가 있는 딸도 있고,
이제 나이도 40대 중반 뭘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운혁도 반찬가게 창문 너머에 윤희를 봤을 때 바로 알아봤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운혁에게 남은 시간은 길어야 몇 개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3개월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젠 너무 늦었어"
운혁은 매일 반찬가게에 들렀다.
윤희는 운혁이 좋아하는 반찬을 항상 살폈고 할 수 있는 최대한 솜씨를 내었다.
운혁이 자신의 반찬을 맛있게 먹는 것은 상상하면 윤희는 기분이 좋았다.
둘은 여전히 모른척하고 지냈다.
어느 날부터 운혁이 반찬가게를 찾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운혁은 보이지 않았다.
윤희는 덜컥 겁이 났다.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윤희는 운혁의 집에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몇 번 배달 주문을 했기 때문에 윤희는 운혁의 집을 알고 있었다.
지섬 아파트 508호...
"띵동 띵동
"아무도 없어요"
“어디 갔을까?”
경비 사무실에 물어보니 운혁은 집을 정리하고
며칠 전 요양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어디 요양병원인가요?"
"거야 제가 모르죠?
"자기는 절대 구례를 떠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구례 요양병원 어딘 가에 있겠죠!"
윤희는 구례에 있는 모든 요양병원을 찾아다녔다.
윤희가 운혁을 찾았을 때 운혁은 생명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내 인생이 끝나는구나..:" 운혁은 눈을 감았다.
처음 윤희를 봤던 그날이 떠올랐다.
흰색 티셔츠에 청바지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운혁의 눈에 윤희는 세상 그 누구보다 빛나 보였다.
운혁은 윤희의 집을 찾아갔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윤희의 어머니가 챙겨주던 밥상과 윤희가 만들어 주던 반찬가게의 반찬들....
운혁은 이제 그 반찬을 더 이상 먹지 못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운혁은 그날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운혁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저…
이 사람 왜 이렇게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것일까요?"
" 아... 마약성 진통제 때문입니다."
" 아마 곧 깨어나실 겁니다?
"그런데 누구 시죠?"
" 이 분은 한 번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었는데요"
"친구예요"
"아.. "
운혁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윤희가 보였다.
스무 살 시절 그때 윤희의 모습이었다.
“운혁 씨.. 오랜만이에요.
저 윤희예요.
기억하시죠?
네. 그럼요.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어요.
언제나요…
늘. 전 윤희 씨랑 함께 했는걸요.
윤희는 운혁의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저도 운혁씨 항상 생각했어요.
윤희는 운혁의 손을 잡았다.
윤희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운혁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윤희는 운혁의 장례를 치렀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혁의 전화기엔 윤희의 반찬가게 전화번호뿐이었다.
윤희는 운혁을 동해 마을 앞 섬진강에 뿌렸다.
운혁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 반찬가게로 편지가 도착했다.
운혁이 남긴 유언장이었다.
윤희씨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네요.
대학교에 입학하던 첫날 기차 안에서 윤희 씨를 봤어요.
알 수는 없지만 윤희 씨가 내 마음속에 들어왔고,
윤희 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윤희 씨를 찾아 동해마을을 찾았던 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섬진강을 바라보던 일
모두 기억 속에 각인되었답니다.
몇 번이나 윤희 씨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
제가 윤희 씨를 찾았을 때는 이미 결혼을 했더군요.
다시 구례에서 윤희 씨를 만났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윤희씨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고백하고 싶어요.
윤희씨 항상 당신만을 사랑했어요.
늘 보고 싶었어요. 항상 건강하시고 잘 사세요.
-
운혁은 자신에게 남은 모든 재산을 윤희에게 남겼다.
윤희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반찬 가게에 처음 운혁이 들어왔을 때
모른 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잘 가요..
내가
처음
사랑했던
그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