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유언장을 살아생전 미리미리 작성해 놓는다길래, 또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겸 무슨 이벤트로 한 번씩 유언장을 써본다 하길래 나도 공책 한 장 부욱 찢어서 책상 위에 볼펜 한 자루 올려놓고 앉았다네.
무슨 말을 남겨야 하나?
생각나는 순으로 마구마구 지껄이기로 했네.
<홍어에 진심인 내 친구들을 위하여 내 장례식장에 홍어를 넘치도록 준비케 하여라, 홍어를 좀 강하게 삭히거라, 요즘 장례식장에 나오는 홍어보다 살짝은 더 삭혀야 하느니라, 돼지고기 수육은 필히 비계보다 살코기가 더 많게 하여라, 살코기와 돼지비계의 비율은 3:1 수준으로 맞춰 보거라, 돼지고기가 결코 퍽퍽하면 안 되느니라, 야들야들하고 촉촉하게 삶아져야 하느니라, 배추김치는 아주 아주 살큼만 익혀서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를 만나거든 환상의 조화를 이루게 하여라, 무조건 지상 최고의 삼합이 되게 하여라, 내 친구들이 나를 추억하는 시간보다 홍어맛에 감탄하여 넋이 나가있는 시간이 더 많게 하여라, 조문을 마친 친구들이 장례식장을 빠져나갈 때에 홍어의 여운으로 그득할 수 있도록 옷가지에 홍어향이 잔뜩 배게 하여라, 내 장례식장에서 맛본 홍어맛이 내 친구들 사이에서 아니, 세상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도록 하여라, 홍어를...
내 유언장에 홍어 이야기 말고는 쓸 거리가 도통 생각이 나질 않네. 내 아무리 생각해도 남길 말이 없다네. 남길 말을 떠올리려 나도 애써 보았네. 내 처음으로 창작의 고통을 겪는다네, 머리를 뜯고 쥐어짜봐도 안 나온다네.
이 유언장은 아무래도 모냥이 빠져서 몬 써먹겠네.
이 유언장을 공개하는 게 그만 챙피해 죽겠네, 그리하여 아직은 챙피해서 못 죽겠네.
유언장에 쓸 만한 것이 홍어밖에 없다니 이것 참 우스운 인생을 살았네, 유언장에 홍어만 달랑 남기기에는 나나 보는이나 멋쩍기 서로 그지없으니 내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 모양일세. 내 이 세상 쪼매 더 살아보다가 구색을 갖춘 유언장을 다시 작성해야 할 모양이네 그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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