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추억 Jan 08. 2025

은진이에게

은진아 너는 어떻게 생겼니
너는 장점이 있긴 한 거니
나는 오늘 너의 단점만을 듣게 되었어
은진이 너는 흉측하게 생겼니
은진아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인 것 같으니 말은 놓을게
은진아 오늘 너를 위한 모임이 있던데
은진이 너는 혹시 알고 있었니
나는 아침에 첫 손님으로 이 카페에 왔단다
은진아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에 약 3미터 전방에 여자 둘이 들어와 앉더라
은진아 그 둘은 너의 직장동료 같더라
은진아 나라도 너에게 고자질을 해야겠더라
은진아 이건 결코 이간질이 아니니 잘 들어봐
너의 직장동료 둘은 은진이 네가 이해가 안 된대
네가 짜증난대
네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싫대
근데 은진이 네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잘 안 하는 모양이더라
오늘 은진이 너만 빼고 둘이서만 만난 거더라
은진이 네 험담을 무려 세 시간 가까이하더라
와... 이게 바로 지구력이라는 것을 배웠지
은진아 너는 오늘 이유도 모르고 얼마나 고막이 힘들었니
너의 이름이 거론된 횟수를 바를 정正자로 그어볼 걸 그랬어 그치만 그녀들의 스피드를 내 펜이 쫓아가지 못했을 거야 잉크를 다 마르게 했을 거야 내 펜은 허무하고 한심하게 죽었을 거야
은진아 너의 이름이 제법 흔한 게 다행이야
전국의 모든 은진이들이 네 대신 그녀들을 응징해 줄 것 같더라
은진아 좋겠다
너의 이름이 오늘 허공에 가득했다
너의 이름이 오늘 내 귀에 노이로제로 남겨졌다
은진아 너는 오래 산다
욕 많이 얻어먹으면 오래 산다고 그러더라 은진이 영생하겠더라
은진아 나는 그녀들이 측은하더라
은진이 너를 공격하느라 자신들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 못 채더라 아까운 줄 모르고 의미 없이 시간을 흘러 보내더라
은진아  네 뒷담화가 길어질수록 그녀들이 점차 이성을 잃어가더라 수치羞恥를 잃어가더니 데시벨이 높아지더라 너의 직장동료가 한 명만 더 같이 왔더라면 나는 너무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었을 거야  여자 셋이 모여서 창문 깨고 잔을 깨고 천장에 샹들리에를 모조리 박살 냈을 거라고
은진아 나는 그녀들을 통해 지구력 말고도 좋은 걸 하나 더 알았어
은진이 네 이름을 그녀들이 카페 탁자에 올려놓고 시시콜콜 재미지다 떠들고 웃기도 계속 웃었는데
글쎄 비웃음이 이렇게 천박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 나는 살면서 천박하다는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내 입술이 참 어색해하더라
은진아 지칠 줄 모르는 험담을 듣고 있던 내 두 귀가 내게 뭐라고 한 줄 아니
그녀들의 입에 제발 재갈을 물려달라고 사정사정했지 내 두 귀가 아주 울기 직전이더라
내 두 귀가 그녀들의 이야기에 한심 한숨 한탄 짜증 난다 했지 차라리 쌍욕을 듣는 게 낫겠다고 하더라
은진아 나는 형사처벌 당할까 봐 그녀들의 입에 재갈을 못 물리겠다고 하니까 글쎄 내 두 귀가 두 손에게 부탁하더라 두 귀를 손바닥으로 압착해서 외부와 단절시켜 달라고
은진아 내 두 콧구멍도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게 부탁하더라 어디서 썩은 내가 풍긴다고 콧구멍을 빨래집게처럼 틀어막아달라고 부탁하더라
은진아 콧구멍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입이 경악하더라 입으로만 숨 쉬면 그 썩은 내가 위장에 들어와 구토가 유발된다고 말이야
은진아 너희 직장동료들은 너와 MBTI 같은 것이 많이 다른 가 보더라
은진아 너는 정말 흉측한 거니,
아니면 그녀들이 미성숙해서 틀림과 다름도 구분 못하는 거니 그녀들은 서른 살 이래
아니면 인간은 다 그럴 수 있는 거니
그녀들의 놀라운 지구력을 보니 은진이 너는 그녀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겠더라
은진아 차라리 구설수에 오르는 쪽이 낫더라 인생이 딱한 것보다는 말이야
은진아 그녀들과 놀지 마
그녀들이 누군지 알아야 안 논다고?
은진아 그녀들의 인상착의 다 일러 줄까
그녀들은 아주 흉측하게 생겼을 거야
다행히 내 앞에 기둥하나가 지푸라기처럼 있더라 그 덕에 안 본 눈을 사지 않아도 되었지

저 가냘픈 기둥이 글쎄 방음이 되겠느냐고... 안 본 눈이 된 것 만으로 감사해

은진아 네가 흉측한 것도 아름답게 보는 눈을 가졌을까 봐 단서 하나 남긴다
그녀들이 왔다 간 카페는
순천 중앙동에서 큰 카페에 속하고
험담이 오버해 버린 장소가 되어버려서
카페 이름에 Over가 들어갔어
스벅처럼 전국에 다 깔린 카페 이름이야
은진아 그녀들이 이 카페에 걸어 나가면서도 끝까지 네 이름을 내게 들리게 하더라 그렇게 서로 웃고 나가더라
은진아 나는 그녀들의 일관성에 혀를 내둘렀지
우와 마지막까지 대단한 지구력이야 그녀들이 마라토너가 되었다면 길이길이 스포츠 영웅감이 되었을 거라고!
은진아 그녀들의 오늘 하루는 은진이 네가 주인공이었더라
그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고 은진이 네 이야기뿐이었으니까
은진아 내 詩의 주인공도 오늘 어쩌다 은진이 너다
은진아 이건 복수의 詩야 응징의 詩야
세상에 그런 시가 다 있느냐고? 내가 금방 만들었어
은진아 그녀들이 갔는데도 허공에 네 이름이 둥둥 떠다니는데 여긴 복층카페라 천장이 높기도 하다
은진이 네 이름이 생선 구운 냄새처럼 내 머리카락과 옷에 배겨 버렸어
은진아 네 이름은 잘못 없고 그녀들이 네 이름을 꺼낼 때마다 튄 그녀들의 침방울이 잘못인 거야 독사 혓바닥에서 떨어지는 침방울과 매우 흡사하더라
은진아 나는 집에 가서 귀부터 씻고  입고 있던 옷은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샤워를 할 거야 오늘은 샴푸질을 두 번 할 거야
은진아 네 인생에서 오늘 네 이름이 가장 많이 불려진 날이지 않을까
너의 직장동료들을 통해서,
그리고 뜬금없이 나를 통해서 말이야
은진아 일면식도 없이 너랑 꽤 친해진 것 같다
은진아 그녀들과 굳이 같이 안 놀아도 된다
은진아 나랑 노는 건 어때?
난 많이 아프지 않은 날에는
Over라는 영단어가 들어간 카페 창가 쪽 제일 구석진 곳 귀퉁이에서 끄적이고 있다

인상쓰는 것 마저 똑같다

옛날에 국희라는 드라마 있었는데 은진이 너는 모를 거야 거기 나오는 국희가 나랑 똑 닮았다고 내 친구들이 그러더라  국희샌드 먹을 때 나는 나를 먹는 것 같아 그 카페에 국희랑 똑 닮은 사람이 좀 나이 들어서 앉아 있을 건데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책을 읽든지 뭔가를 끄적이든지 하고 있을 거야  그게 바로 나야

은진아 힘내라

웃는 거 마저 소름끼치게 닮았어. 널 보면 이렇게 웃어 줄거야. 은진아, 우리 만나면 너와 나를 이야기 하자. 은진아, 웃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