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다시 눈을 감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기상하고, 항상 지켜왔던 루틴들을 거부하고, 이날은 평소답지 않게 그냥 의식의 흐름에 날 맡겨 보았다. 겨우 30분 더 자고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늘 그렇듯 스마트폰 속으로 영감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내 눈에 들어온 롱블랙의 힙노시스 인터뷰. 눈여겨 본 전시 관련하여 인터뷰 콘텐츠를 읽다 보니 이날따라 유독 자유롭던 의식은 일을 하지 않아야 핑계를 찾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내렸고, 책상에 앉을 마음은 없었다. 찾고 찾았던 핑계는 이게 전부다.
그렇게 난 평소의 나와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 즉흥적으로 외출 준비를 하고, 힙노시스 전시 하나를 보기 위해 광교에서 종로까지 향했다. 전시에 대한 기대보다 그냥 늘 갇혀있던 공간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인 듯했다. 이동하는 동안이라도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고 싶어 비가 왔지만 자차 대신 대중교통을 택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뚜렷한 방향도 없이 의식의 흐름에 맡긴 채 나아가고 있는 지금 마치 ‘부유(浮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이런 걸 ‘방황’이라고 정의했다. 거의 분기별로 한 번씩 찾아오는 현상인데, 변화된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보아 이제는 방황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적확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방황 : 분명한 방향이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함
부유 : 행선지를 정하지 아니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비슷한 의미 같지만 분명히 다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방황과 부유 사이에는 ‘선택’이라는 차이가 있다. 방황은 ‘선택이 없는 행동’이다. 일시적으로 분명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행동이다. 그러나 부유는 갑작스럽긴 하지만 방황을 목적으로 두고, ‘방황을 선택하는 행동’이다. 천성이 목적 지향적이고, 계획적인 나에게 둘 다 반가운 행동은 아니나, 어찌 됐건 방황도 목적이라면 목적이니 방황보단 부유하는 게 심적으로 안정이 된다.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한 경복궁역, 오랜만에 오는 동네다. 이 동네를 걷는데 문득 예전에 와디즈 PD를 하면서 다양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미팅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아도 에너지가 남아돌 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이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직업적으로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장소를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난 절대 스스로 그러한 경험들을 택하지 않았을 테니까.
평일 오전 시간대로 전시장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좋았다. 새로운 공간에 온 것만으로도 환기가 되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아침에 롱블랙 인터뷰를 읽고, 바로 그날 전시를 보러 가서인지 더욱도 몰입도가 높았다. 관람을 하며 이것저것 사진을 찍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다가 스스로 자각한 사실은 내가 이미지보다 문장과 단어 즉, 텍스트 사진을 정말 많이 찍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문장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문장 안에서도 내 마음을 강하게 이끄는 키워드를 계속해서 포착하려고 했다.
전시가 끝날 때쯤 문득 다음에 가야 할 행선지가 떠올랐다. 그곳은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이다. 며칠 전부터 이곳이 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큰 방안에 반가사유상 딸랑 2점이 놓여있는 그 공간이 어찌나 평화로워 보이던지 이 방에 들어가면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앉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그런데, 사색에 잠기고 싶어 찾아갔던 사유의 방엔 사람들이 넘쳐났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서 현장학습을 왔는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 ‘하, 진짜 뭐 하나 내 예상대로 되는 것이 없구나..’ 허탈한 발걸음을 뒤로하고, 그대로 집에 돌아가긴 아쉬워 3층을 구경했다.
다행히 3층은 조용했다. 단아한 백자와 우아한 청자를 구경하다가 우연히 불교조각까지 관람하게 되었다. 부처의 표정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진다. 물론 난 무교다. 무교라서 좋은 점은 하나님, 부처님, 해님, 달님 심지어 돌하르방까지 상황마다 나에게 유리한 대상으로 바꿔가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막상 거대한 불상 앞에 서니 기도보다는 질문이 더 앞섰다. 대답은 없겠지만 간절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인생은 결국 원하는 방향과 목표대로 나아간다지만 그 과정에서 왜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변형되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냐고. 목표만 이루면 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그 과정의 계획마저도 목표이기에 결과적인 목표만 이루어진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과정의 계획까지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영원히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바보 같은 선택인 것이다. 그래서 답답했다. 왜 내 인생인데 내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냐고.
이러한 인생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전체는 되는대로’를 삶의 슬로건으로 내거는 이동진 평론가. 그런데 나는 아직 ‘되는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았으면 인생전체, 아니 부분만이라도 내 맘대로 되면 안되나?’이 마음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거다. 물론 이 마음은 나이가 들면 서서히 사그라들 것이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다. 이게 세월이 주는 힘인 거겠지. 그러니 난 아직까지 아주 젊고, 어리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랜다. 해탈한 듯 또는 비웃는 듯한 부처의 미소를 보면 한참을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불상을 다 관람하고 집에 가려는데 나도 모르게 그리스 로마 전시관 앞에서 발이 멈췄다. 러닝 하는 시간에 맞춰 집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전시를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전시 초입만 대충 훑고 나오자는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화려한 그리스 로마 조각상들을 보자마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책 속에서만 보던 철학자와 신들의 조각상에 넋을 놓고 말았다. 그렇게 넋 놓고 전시를 보다가 어떤 한 인물의 조각상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 인물을 보자마자 마치 몇 년 만에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나도 모르게 반갑고도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 인물 조각상은 바로 나의 우상,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이 사람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이 사람의 일기장(명상록)을 수시로 훔쳐보고, 마음을 단련시켜왔기에 이 사람을 보자마자 내적 친밀감이 폭발했다. 몇 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의 조각상을 보면서 그를 붙잡고, 나의 고민을 늘어놓고 싶은 욕구가 솟구칠 정도로 반가웠다.
그렇게 혼자서만 반가움을 표하다가 다시 방을 나와 진짜 마지막으로 들린 일본 문화 전시관. 스스로 시간을 압박하여, 꼼꼼히 보진 못했지만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것은 지난주 생각 조각의 주제였던 ‘와비사비’라는 단어였다. 대충 훑어보는 와중에도 아주 작게 적혀있던 단어가 내 눈에 포착된 것이다. 조각상에 이어 작은 단어 하나에 반감움을 느끼며, 사진으로 기록을 남겼다.
‘부족함 가운데서도 마음이 충족될 수 있음을 발견해 내고자 하는 것’ 마치 지금의 내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 같았다. 방황 자체가 목적이라 했지만, 스스로 부족하다 느껴 부유하고 있는 나를 채우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는 이 시간, 와비사비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이날의 외출은 뚜렷한 방향도 목적도 없었다. 그냥 부유하고 싶은 날에 힘껏 부유하도록 놔두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스스로 그 어떤 영감도 깨달음도 내 안에서 억지로 꺼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부유하던 날 우연히 만난 부처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나에게 그 어떤 해답도 깨달음도 주진 못했다.
이런 생각으로 마무리하며, 돌아오는 길에 스마트폰 속 사진첩을 열어봤다. 이미지보다 더 많이 찍었던 단어와 문장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그런데 그 글자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듯했다.
‘그저 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관대로 살아가면 될 것’ 부처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나에게 답을 알려주진 않았지만 오늘 내가 찍은 사진들이 나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답은 내 안에서 찾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