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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Oct 27. 2024

입대를 결심하고


세명의 여인 사이에서 마음 어지러워 방황하던 사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고로 인해 한 여인을 가슴 아프게 떠나보냈다.


어느새 대학교 1학년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 더 정확히 말하면 죄책감과 눈앞의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결정은 비겁하게도 한 학년만 더 다닌 후 군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졸업하고 가든 가야만 하는 곳이라면 빨리 다녀오자 하며 자위했지만, 그건 분명 도피였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데.. 어떻게든 감정이 정리가 되겠지.  잊을 사람은 잊을 테고, 잊힐 사람은 잊혀지겠지..  군에 가서 삽질하고 있다 보면 제대하기 전까지 자연스럽게 이 마음도 필터링이 되겠지.. 아마도 그런 생각이었다.


그렇게 입대일이 잡혔다.


1995년 2월 27일.   


민아는 준혁이 장례식을 계기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분명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날의 일을 계기로 마음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잘 살고 있으면 모를까 그렇게 되어버린 경희를 두고서 나와 잘해보려는 생각을 차마 할 수 없어 포기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차피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진 않았던 이상, 난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 그대로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우정을 나눈 친구이자 나에게 마음을 줬던 친구한테 난 해준 것이 없었다. 내 마음도 너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건네었을 뿐, 단 한 번도 제대로 사귀거나 주변에 공식화한 적이 없었다. 민아는 오래도록 날 기다려 주었지만, 결국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되어버린 것이다.  민아는 이후로 함께 일했던 카페를 완전히 떠났고, 사장 누나와도 연락이 뜸해졌다고 한다. 나와는 여전히 가끔씩 주말에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셨지만, 차츰차츰 만남이 거듭될수록 어색함은 더해져 갔다. 민아가 나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난 입대 소식까지 민아에게 전했다.  민아는 덤덤하게 들으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리고 예전 경희처럼 힘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도 주식이며 부동산 공부며 요즘 열심히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 역시 중요한 리포트나 시험, 혹은 행사나 MT 등의 이유로 약속을 깨는 일이 한번 두 번.. 생기게 되면서 언젠가부터 얼굴 보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2학년의 대학생활도 지나가고 계절은 1994년의 겨울로 들어서고 있었다.

민아는 그동안 악착같이 돈을 잘 모았는지, 어느 날 연락을 해 자신의 가게를 차리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했다. 여의도에서 바를 운영한다고 한다. 나도 가끔 놀러 오란다.  난 조만간 한번 놀러 가겠다면서 진심으로 축하해 줬고, 그녀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잘 된 소식을 듣고 민아에 대한 마음이 조금 놓이니, 이내 경희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민아에게 물어봤지만, 자기도 요즘 너무 정신없이 지내서 잘 모른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내가 알아보고 연락할게’라고 했을 텐데, 둘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아니면 경희가 민아에게도 마음의 문을 닫아 서로 연락이 뜸해진 것인지.. 왠지 모를 무심함이 느껴졌다.


난 다음날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여의도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민아가 운영한다는 바로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왠지 경희의 소식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게 한가닥 희망을 품고, 오랜만에 민아를 다시 만나기로 결심했다. 바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 향긋한 향기와 함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 안이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좁은 느낌이 들지도 않았고, 아담하지만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느껴졌다.


“어서 오세..” 인사를 하던 민아의 음성이 멈췄다. 민아는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는지 글라스 잔을 휘휘 젓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그녀가 말했다.


"그래, 잘 지냈어, 민아?" 난 어색하게 물었다. “어제 조만간 놀러 가겠다고 했잖아. 말 나온 김에 오늘 수업 끝나고 바로 왔지”


"응, 바쁘게 지내고 있어. 여기서 보니 정말 반갑다. 내 가게 어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가게에 대해 물었다.
자신이 이룬 작은 성취를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듯이.

하지만 내 대답도 듣기 전에 이내 말을 이었다.


“놀러 오기는” “경희 때문에 온 거지? 급하긴 급했나 보다. 천하의 정재용이 이렇게 쪼르르 달려오고”


난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민아야, 이렇게 너의 가게를 오픈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이게 얼마만이니.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을지, 여기까지 오는데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난 상상도 잘 안된다. 말 못 할 사연들이 많이 있었겠지. 오늘 술 한잔 하자.”


“그리고 어제 전화할 때도 물어봤지만, 혹시 경희 소식 정말 모르고 있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난 왠지 네가 경희 소식을 아는데 나한테 얘기를 안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 경희가 그렇게 하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네가 이렇게 잘 되어서 너무 마음이 좋고 기뻐. 그런데 경희는 그날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떠나간 뒤로 보지도 못하고 소식도 모르잖니. 내가 보낸 편지가 반송되어 온 것을 보니 집도 이사를 했나 보던데.. 경희가 잘 지내는지만 알고 싶은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민아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그리고 짧은 한마디가 이어졌다.


"잘 못 지내고 있으면 어쩔 건데?”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민아의 한마디는 핵심을 짚어 나의 가슴을 훅 파고 들어왔다.


“그건..”


“휴, 너가 뭘 어찌해 줄 수 있겠니. 미안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데.”


그녀는 한숨을 쉬며 얘기를 이어갔다.


"말 안 해도 너무나 잘 알겠지만, 경희는 그날 이후로 많이 힘들어했어. 준혁이가 죽고 나서 경희는 너를 마음에서 떠나보낸 듯했고, 딱히 다른 의지할 곳도 없었어.  당장은 일도 못하고 계속 앓듯이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내가 도와줘야 했고.”


“난 몇 달 동안 집 월세를 내주고 하루이틀에 한 번씩 집으로 찾아가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챙겨줬어. 그러다 몇 번 이제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냐고 달래 보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면 경희는 언니도 그냥 가 버리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휴.  경희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나조차도 역부족이었어. 너에겐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하지, 그렇게 자신을 고립시키고,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던 것 같아.”


“결국 내가 나도 네 부모도 아니고 나 살길 찾는 것도 힘든 마당에 너가 이렇게 협조 안 하고 계속 정신 안 차리고 있으면 나도 더 이상 모르겠다고 하고는 삼백만 원을 넣은 봉투를 던져두고 나왔어.  그 이후론 나도 연락을 안 했어.  경희에게서 연락이 오지도 않았었고. 삼백이면 나에게 얼마나 큰돈인지 알지?”  


그렇게 지내고 있다는 얘기에 경희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지만, 또 그렇게까지 챙겨준 민아가 고마왔다. 난 말없이 민아의 두 손을 꼭 쥐면서 눈빛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민아는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 연락해도 계속 연결이 안돼서 혹시나 하고 오랜만에 한번 집을 찾아가 봤는데, 경희는 이사를 갔는지 떠나고 없었어.  다른 아줌마가 나와서 얘기해 줬지. 그러다 어제 너한테 내 가게 열었다는 소식 전하러 전화했는데 너가 경희 얘기를 물어봤던 거야..”  


“경희는 아마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새로운 곳으로 떠나 어딘가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차가운 현실을 마주한 듯했다. 경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내 결심했다. 그녀를 찾아야겠다.  최소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내 눈으로 확인하고, 걱정될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는 꺼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마지막 의무라고. 거기까지는 해야 내가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민아와 술잔을 기울였고, 오랜만에 옛 친구이자 옛 여인과 진탕 술을 마시며 난 잠시동안 마치 과거 고등학생 때 가출했던 시절의 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고맙다 민아야..”

“넌 나에게 늘 힘이 되어 줬어. 거꾸로 난 너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더 미안해..”


민아와 난 조용히 서로를 응시하면서 쳐다보았고, 어느새 우리의 눈빛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기운이 올라 불그스레 물들어 있는 민아의 양볼은 바의 은은한 조명과 맞물려 내 가슴을 진탕 시켰다.


마침 오픈 초기라 아직 직원까지 뽑지는 않았고, 내가 꽤 이른 시간에 찾아온 터라 가게에는 손님도 없었다.

난 민아 옆자리로 자연스레 옮겨 앉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던 내 손은 그녀의 가녀린 목 뒷부분에 가볍게 다가갔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새빨개 보였다. 그렇게 서로의 입술이 다가갔고, 어느새 우린 깊은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경희가 잘 살고 있는 소식을 듣지 못한 채라 술기운에도 약간의 찜찜함이 남아 있었지만, 민아 옆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그 찜찜함은 내 뇌리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키스를 하면서 내 다른 쪽 손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더듬어 가려던 순간, 가게의 문이 열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아야~ 오빠 왔다!”


화들짝 놀란 우린 급히 떨어져 앉았고, 민아의 표정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당황함이 역력했다.


“수아야, 오빠 오늘 외근 나왔다가 일이 일찍 끝나서 바로 너한테 달러왔.. 어, 손님이 계셨구나? 어우 이런 이른 시간인데 벌써 술 좀 마셨나 보네~?”


사내의 명랑하면서도 약간은 꺼림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순간 생각했다. 여기서 손님인 척하고 더 앉아 있어 봐야 서로에게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순간 이 사내가 아직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던 민아의 현 남친인건지, 남친은 아니지만 그녀를 좋아해 매달리면서 일종의 스폰(?) 역할을 해주고 있는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난 지체 없이 일어서며 말했다.


“수아 씨, 오늘 즐거웠어요. 오픈 축하하고 앞으로 종종 봅시다!”


난 이른 시간 개시를 해 준 뜨내기 손님인 척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앞으로 걸아갔다. 혹시라도 나를 그녀의 애인으로 오해하기라도 한다면 민아에게 좋을 일이 없었다.  눈치가 빠른 민아가 내 마음을 모를 리 없을 터, 바로 자연스러운 마담과 손님의 대화가 잠시 이어지면서 민아는 내가 내민 카드로 결제를 했고, 난 그렇게 바를 나섰다.


뒤에서는 “누구야?” 하는 그 사내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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