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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Oct 27. 2024

입대전야


그러는 사이 어느새 겨울방학도 다 지나가고 있었다.


1995년 2월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모아놓았던 돈은 다 써버리고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불편하면서도 걱정하는 눈빛의 부모님의 시선을 외면하며 내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지낼 뿐이었다.


그리고 난 주변 누구에게도 경희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경희가 어딘가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잘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두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녀의 죽음은 내 가슴속에서만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2월 26일 입대 전야.


난 받을 길 있는, 그리고 받을 길 없는 그 모두에게 손 편지를 남기고 입대에 앞서 외롭고 불안한 마음을 정리하며 잠을 청했다.  106 보충대 신검 후 의정부가 아니라 논산 훈련소 입소를 명 받았기에 먼 길을 떠나야 했고, 어머니는 시골까지 오랜만의 먼 길 운전에 대비해 우리 집의 애마, 소나타를 세차하고 오신 후 일찍 잠에 드셨다.  아버지는 소주 한잔을 따라주시며 거꾸로 둬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씀을 하시며 막내아들의 긴장을 풀어주시려는 듯했고, 이제 막내도 군에 가는구나..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드셨는지 내가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더 한잔하시는 듯했다.


거실에서 가져온 전화기 선을 방에 꽂고 민아에게 삐삐를 쳤다.

딱히 삐삐까지 칠만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고, 종강 때 마지막으로 봤던 기은이는 일주일 전 학교 앞에서 열린 환송회 때 봤었기 때문에, 방학 내내 연락 안 하고 신경도 못쓰고 지낸 터에 이제와 입대 전날이라고 따로 연락하기에는 할 말도, 염치도 없었다.  민아는 일하고 있어서 통화를 할 수 있을지, 그래도 내일 떠나기 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을 때 목소리 한번 듣고 싶었다.


삐삐 답장이 왔다.


1.2.5.5.   여기로 오란다.

3.5.7.5   사무치게 그립단다.


그동안 그렇게 대면대면하더니 갑자기.. 내가 연락을 안 했어도 연락이 왔을까?  손님들하고 술 마시느라 좀 취했나 싶다.  어쩐다.. 선뜻 아무런 대답을 남길 수가 없었다.

목소리나 듣고 싶었는데.. 괜히 남겼나.. 내일 아침 일찍 어머니가 모는 차를 타고 집을 나서야 하고, 아버진 거실에서 아직 술을 드시고 계신데, 지금 어딜 나간단 말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속에선 안달이 난다.


.. 8.2.5.5   다시 삐삐가 왔다. 빨리 오란다.


애타하면서도 아버지라도 방에 들어가셔야 잠깐 나가기라도 하는데.. 그러다 잠시 어떻게 잠이 들었나 보다. 눈 떠보니 시간은 이미 다음날 새벽. 화들짝 놀라 곧바로 삐삐에 손이 간다.  입대전야라 긴장을 많이 했었나 보다. 어이없게 잠이 들더니..


불과 3, 40분쯤, 조금 전 새벽. 마지막 숫자가 찍혀 있었다.


0.1.7.9.4.2


오지도 못하고 담장도 없는 나에게 얼마나 실망하고 서운했을까.  빈 속에 술도 많이 털어 넣었을 텐데..  자기 속은 무너졌을 텐데도, 그나마 군대로 떠나는 내 속 편하라고 대답 없는 너에게 음성 메시지라도 욕 한번 남기지 않고, 마지막 신호를 이렇게 남겨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고맙다! 민아야..

그래, 우린 영원한 친구 사이…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눈은 부은 채로 아침은 먹은 듯 마는 듯 집을 나섰다.


날이 제법 추웠기에 어머니가 내려가서 차 시동을 먼저 걸어놓으라고 하셔서 키를 받아 들고 1층 현관을 나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키를 눌러 차 위치를 확인한 후에 걸어가는 데, 문득 인도 저편에 있는 공중전화박스에서 누가 걸어 나온다.


“기은아..!”


당황스러웠다. 삐삐도 없었는데 갑자기 집 앞에서 마주칠 줄 어찌 알았으랴.


기은이와는 이미 일주일 전 학교 앞에서 여러 동기, 선배들과 함께 한잔 하며 환송회를 감사히 받았던 터였다. 그때 부대 가서 쓰라고 손크림과 손톱 다듬는 세트 선물도 받았는데.. 이 아침에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하다.


“어제 너네 집 앞에 찾아와 봤었어.”

“어느 단지 몇 동인지 미리 알아두려고. 오늘 아침에 와서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오늘 새벽 일찍 대치동 집을 나서 좌석버스를 타고 온 거란다.  입대하는 길 같이 가고 싶다고..  그러니 뭐라 하지 말고 자기 돌려보내지 말란다.


쿵쾅쿵쾅.. 가슴이 뛴다.

아버지 어머니께 전혀 미리 말씀드려 놓은 게 없던 지라 속으론 걱정이 밀려왔지만, 겉으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고맙다, 이 추운데 대체 언제부터 와서 거기 있던 거야.. 잠깐만 있어봐.  지금 시동 켜놓으러 잠깐 나온 거고, 올라가서 부모님 모시고 내려올게.”


그렇게… 논산까지 그 먼 길을 부모님과 나, 기은이 4명의 고요하고 어색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 군 입대길에 부모가 함께 하는데, 사전에 보고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처자가 마뜩잖으셨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성정을 잘 알기에 혹여나 맘에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을까 싶어 이것저것 물어보시며 미리 자꾸 쉴드를 치셨지만, 초행길 고속도로 운전에 집중하느라 이내 자동차 안은 고요해졌다.


난 너무나 당황스럽기도 하고, 너무 고맙기도 한데 부모님이 같이 계시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어색한 짧은 머리를 애써 숨기려 하며 그저 가끔씩 기은이를 쳐다보고, 기다리느라 차가워진 손만 꼭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논산 훈련소에 도착했다. 여느 날과 다른 긴장감과 묵직한 분위기가 내 온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입소하기 전, 짧은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애써 미소를 지으셨고, 어머니는 눈물로 차오른 눈동자를 애써 감추려 했지만 떨리는 입술이 모든 감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기은이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왔다. 너무나 많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오로지 두 마디였다.


"기다려 주겠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순간, 우리 둘 사이에 모든 말과 감정이 전해졌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한 뒤, 나는 훈련 대열에 합류했다. 훈련소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매일 반복되는 체력 훈련과 정신 훈련,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전우애 속에서 나는 조금씩 복잡했던 감정들을 정리해 갔다. 물론, 경희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 아프게 마음이 아려왔고, 민아와 기은이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그리움도 밀려왔다.


민아와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정리되어 갔다. 민아는 나를 좋아했지만, 어차피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이라면 내가 먼저 정리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많이 힘들었다고. 그리고 그날 보았던 사람은 자기가 가게를 열도록 도와준 사람이라고 했다. 그냥 그렇게만 쓰여있었다.


그리고 경희가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정말로 돈을 많이 벌어서 누구한테도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나를 지켜줄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다고.. 그렇게 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겠다는 결심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난 그 편지를 받고 나서야 지난 반년 넘은 시간 동안 민아가 왜 변한 것 같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난 너무나 미안했지만 그렇게 해준 민아 덕분에 내 마음도 정리되어 감을 느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 세상엔 많은 변화가 있었고, 나도 많은 배움을 얻었다. 그리고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기은이와의 관계는 더욱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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