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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Oct 27. 2024

어긋날 뻔한 운명, 새로운 다짐


상병이 되고 몇 달이 지났다. 조금만 더 있으면 대장 위의 '병장'을 달 참이었다.


세상과 동떨어진 외로운 섬에 고립된 채 뒤떨어져 가는 기분.. 그 기분 나쁜 느낌도 서서히 적응되어 가고 최소한 낮의 일과시간 동안은 군 생활에 익숙해져 기계적인 루틴을 아무런 생각 없이 이어갈 수 있는 정도의 내공이 쌓인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침을 먹고 내무반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늦은 오전쯤일까, 일직사관이 호출한다. 부모님이 면회 왔으니 복장 갖춰 입고 나가 보란다.


‘오늘은 외박 좀 나갈 수 있겠구나..’


내심 기분이 좋아져서 서둘러 준비를 한다. 보통 친구나 애인이 오면 외출만 끊어주지 외박은 잘 안 보내 주지만, 부모님이 오시면 대체로 외박을 허가해 주기 때문이다. 시내 나가서 고기도 좀 먹고, 용돈도 좀 받고.. 어쨌든 자식에게 있어 부모님은 정말 감사하고도 세상 편한 존재다. 어느새 내 머릿속은 시내에 나가서 뭘 할까 궁리 중이었다.


PX에서 만난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곰보빵을 사드리며 잠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는 군대 안에서 그 느낌을 좀 더 즐기고 싶어 하시는 눈치였지만, 어머니는 어서 나가자고 맨날 여기서 근무하는 애를 빨리 데리고 나가서 바람 쐬 줘야지,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채근하셨다.

그렇게 오랜만에 어머니가 운전하는 소나타를 타고 뒷좌석에 앉아 창문을 열어 들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얼마간 달렸을까, 눈을 떠보니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매끈한 포장도로가 나올 참이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빵빵 거리며 지프차가 달려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도로엔 다른 차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 차를 보고 클랙숀을 울리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외박을 나와서 몰래 택시를 잡아 타고 위수지역을 이탈해 서울로 가는 소위 ‘점프’를 뛰는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이 면회 와서 정상적으로 신고를 하고 위수지역 이내인 동두천 시내로 나가는 길이었기에 쫄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는 속도를 줄이고 있었고, 뒤돌아 보니 가까워지는 지프차는 우리 부대의 중대장 차였다.

우리 차를 지나 바로 앞에 세우더니 내리는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신고를 드렸던 일직사관 김철민 중사였다. 처음엔 많이 갈궜었지만 경리업무까지 담당하던 내가 본인도 받을 수 있는 건지 모르던 간부수당을 챙겨서 받게 해 준 뒤로는 나에게 상당히 우호적으로 바뀌어 나름 친하게 지내던 터였다.


“충성!” 경례를 하고 앞으로 다가섰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왜 금방 부모님과 함께 외박을 내보낸 부대원을 쫓아온 걸까? 궁금증이 몰려왔고 내 시선은 중사님의 입에 쏠렸다.


뒤에서 부모님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김중사는 나에게 손짓을 해서 조금 더 가까이 오라고 한 뒤에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야, OO 씨, 너 여자친구 맞지?’


“네, 맞습니다.”


뜬금없이 갑자기 왜 내 여자친구 이름을 들먹이는지 의아하던 찰나, 김중사가 말을 이었다.


‘야, 지금 너 면회 왔어 짜샤.. 근데 기다리다 위병소에서 너 외박 나갔단 말 듣고 삐져서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난 나중에 얘기 듣고 가봤는데 대기소에는 없더라고. 있으면 내가 데리고 차에 태워서 같이 나오려고 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엇갈렸나 본데.. 하필 부모님 오신 날 똑같이 왔다냐. 부모님이 너 여자친구 아시냐?’


“네에?” 너무 놀라 그 한마디를 하고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 멍해졌다.


내가 멍청하게 얼이 빠져 서있으니 답답했던지, 날 붙잡아 지프에 태운다.  그리고는 부모님께 얘기한다.


“아, 정재용 상병 부모님이시죠? 전 일직사관 김철민 중사입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여기서 차에 타고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 친구가 잠깐 뭐 좀 해줄 게 있어서 잠시만 부대에 데리고 들어갔다가 제가 다시 여기까지 데리고 오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부모님께 눈짓으로 인사한 뒤, 난 중대장 차량 조수석에 올라타고 다시 부대로 향했다. 내 마음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고마움, 아쉬움, 왜 하필 오늘.. 그리고 엇갈려 결국 오늘 못 만나고 기은이가 그냥 이대로 다시 서울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내 마음은 타 들어가고 있었다.


부대까지 가는 길이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는지.  드디어 저 멀리 부대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에 버스 정류장 앞에서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외로이 서 있는 여인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기은이는 아직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김중사는 지프를 멋지게 돌리며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그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씩 웃으며 내 등을 밀었다.  


“충성!!”


정말이지 고맙고 감동을 받은 마음에 하는 진실된 충성 구호였다.  그렇게 경례를 한 뒤, 난 뒤도 안 돌아보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차를 멈추기 전 저 앞에서부터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내 마음은 진탕 되어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치마는 나풀거리는데 홀로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슬퍼 보이던지..  

뭘 준비한 건지 가방 하나를 무겁게 든 채 먼 길을 찾아와 면회를 왔는데 그 사람이 이미 다른 사람이 찾아와 외박을 나갔다는 얘기를 듣고 낙담한 채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그 마음이 어땠을까.. 너무 미안하고 미안해서 난 두 손을 잡고 아무 말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채로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서리기 시작했고, 난 말없이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흠흠, 헛헛!”


헛기침을 하는 김중사의 소리에 우린 계면쩍게 포옹을 풀었고, 난 김중사에게 기은이를 소개했다. 그리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기은이는 지프차를 타고 나와 함께 다시 시내로 향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김중사 수당은 되는 거 안 되는 거 다 찾아서 최대한 받을 수 있게 해 줘야지!


김중사 덕분에 기은이를 만나서 다시 부모님 차에 올라탔다. 생각해 보니 이거 기은이가 자꾸 우리 부모님께 밉보이는 거 아닌가 순간 걱정이 들었다.  군에 입대할 때도 아침에 갑자기 찾아와서 아버지가 좀 마뜩잖아하셨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자식 면회를 왔는데, 하필이면 이 날 또 부모자식 간의 만남에 끼어든 셈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걱정이 든 것은 오늘 잠을 어떻게 잘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부모님 앞에서 방을 2개를 따로 잡자고 먼저 말씀드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넷이서 다 같이 하룻밤을 지내는 것도 모양이 이상할 것 같았다. 쉽게 생각하면 같이 시내 구경도 하고 저녁식사 하고 좀 늦더라도 동두천 터미널에서 버스를 태워서 기은이를 집에 보내고 난 부모님과 여관에서 자면 될 문제였지만 (아마 아버지 어머니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멀리 면회 와준 기은이를, 게다가 서로 엇갈려 못 만날 뻔한 상황에서 혼자 먼저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결국 내가 또 한 번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난 솔직히 내 마음을 말씀드리고 오늘은 기은이와 함께 있을 테니 아버지 어머니는 저녁식사를 하고 먼저 올라가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너무 죄송스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불쾌한 속내를 내비치셨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참아주시는 게 눈에 보였고,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기은이가 못 보게 슬쩍 용돈을 더 찔러 넣어주셨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서 땀이 나고 실로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로맨틱했고, 우리는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와의 따뜻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동두천 버스터미널에서 기은이를 태워 보냈다. 차창에 양손을 대고 걱정과 아쉬움의 눈으로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은 영락없는 사슴 같았고, 내 마음은 그 눈빛에 하릴없이 무장해제되고 있었다.


그녀를 보내고 부대로 돌아오는 길, 하염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다 어느새 도착할 때 즈음…


지나간 상념들을 정리하며 마음을 정했다.


그녀를 놓치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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