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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Jun 23. 2024

파묘(破墓)와 이장(移葬)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와 온 가족 합장 이야기


할아버지의 얼굴은 손자인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조차 기억을 하지 못하셨다. 사진은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 제사 때 올릴 영정 사진 한 장 없었으니 말이다.  아버지야 어릴 적 십대 이전까지는 당신의 아버지와 지낸 기억이 왜 없었겠냐만은, 할아버지가 전국을 돌아다니시느라 집에 못 들어오시는 날도 많았고 어린 시절이라 이제는 기억을 못 하시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지역 발전을 위해 교육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당시 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셨다 한다. 그러던 중 마을에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웬만하면 집안에서 안 나오던 때에도 불철주야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마련을 위해 애쓰시다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 지금의 초등학교 같은 소학교를 세우시려 했던 건지, 아니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생각하셨던 건지 알 길은 없지만, 교육에 대한 철학은 확고하셨던 듯싶다. 할아버지 젊으셨을 때,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아래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고난을 보고 겪으셨을 터. 그 울분을 모아 모아 생산적인 에너지로 쏟아내셨다 생각하니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돌아가신 때가 1950년 3월이니, 6.25 전쟁이 일어나기 석 달 전이다. 가족들 모두 여태까지 할아버지께선 6.25 전쟁 중에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글에 함께 올리기 위해 12년 전 고향 면사무소에서 받아두었던 개장 신고증명서를 이제야 다시 제대로 보고 전쟁 직전에 돌아가셨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나마 전쟁의 참화는 안 보고 가신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를 보며 많이 안타까워했더랬다. 더불어 존경의 마음과는 별개로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참 야속하기도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언제 결혼하셨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세 남매를 낳고 돌아가신 게 1950년이고 아버지 생년을 고려하면 결혼은 아마 1930년대 후반이나 40년 초반에 하셨을 것이다. 일제 치하 후반기의 엄혹한 시절에 만나신 것이다.


교과서와 역사를 통해서만 접하던 그 옛날 그 시절에 당신께 시집와서, 잠시잠깐 같이 계시다가 홀로 남겨두고 떠나가신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가난한 살림에 할머니 혼자서 힘들게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이 얼마나 크셨을까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는 주위에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홀어미 슬하에서 자라 저렇다’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회초리도 자주 드셨고 아버지를 매우 엄하게 키우셨다고 한다. 아마 큰고모는 맏이긴 하지만 딸이라고, 작은아버지는 어린 막내라고, 이래저래 집안의 큰아들에게 온 신경이 다 가신 거겠지 싶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살림을 하고 자식들 키우며 살아온 탓에 성정도 아마 독해 지셨을 테지..

성정이 강한 분 두 분이 만난 탓에 훗날 고부간의 갈등이 생긴 부분까지..  할아버지는 원인 제공자로서, 무력하고 무능하게 느껴졌던 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로 내 마음속 원망의 덤터기를 쓰실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광주에 있는 가족봉안묘로 모시고, 몇 년 뒤 충북 영동의 고향 선산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까지 가족묘로 함께 모시기 위해 이장을 했더랬다.  온 가족이 죽어서라도 다시 만나면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이는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다. 만약 아버지가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린 생각은 있어도 막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 몇 해가 지나면 아버지는 찾아뵈어도 차츰차츰 고향 선산에 묻히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찾아뵙지는 못하게 되었으리라.


2012년 그해 여름, 이장 신고를 하기 위해 고향 시골의 면사무소를 찾아가 할아버지 이름을 말씀드렸지만, 할아버지 이름으로 도무지 찾아지지가 않았다. 동사무소 직원 분과 한참을 설왕설래하다가 우린 결국 일단 나올 수밖에 없었고, 마을로 돌아가 고향 어르신들께 이리저리 여쭤볼 요량이었으나 좀 막막한 기분이었다.  당시 고향에는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잘 아실 만큼 연로하신 분들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으셨다. 그렇게 마을로 돌아오던 중, 면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이리저리 서류를 뒤져보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던 직원분이 뭔가 단서를 잡았던 것이다.  후에 개명을 하신 이름을 우리가 알고 있던 건지, 아님 우리가 알던 이름이 원래의 이름이었는지, 어떤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의 이름이 두 개가 있었던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알던 함자와 행정기관에 등록되어 있던 함자가 끝 한 글자가 달랐던 것이다.



당시 할아버지가 6.25 전쟁 중에 돌아가신 줄 알았을 땐,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에게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당하지 않을까 하여 이름을 바꾸셨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혹은 학교 설립 자금을 만드느라 이리저리 다니실 때 일부 빚을 지며 만든 자금이 있어 상환 독촉을 피하느라 이름을 바꾸셨던 건 아니었을까, 이리저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었다.


고향 어르신들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선산으로 왔다. 고향 분들께는 당연히 욕도 좀 먹었다. 이제 이장해 가면 1년에 두 번은 꼬박꼬박 내려오던 우리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찌 섭섭하지 않으셨겠는가.  죄송한 마음에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겠다, 한 해 한 번은 오지 않겠냐.. 말씀드렸지만, 이렇게 가고 나면 지금 인사드리는 이분도 다시 보기가 쉽지 않으리란 건 우리 역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선산에 올라보니 계약했던 인부 아저씨들은 와 있었고 이미 작업을 시작하고 계셨다.  지역은 조금씩 달라도 다 비슷한 곳에 사시는 고향사람 같은 분들이라 그런지 일이 알아서 돌아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파묘를 하고.. 이장을 해온 후, 광주의 가족봉안묘에 합장을 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아버지와 함께 모시게 되었다. 아버지의 제단 바로 위, 비어 있던 선대의 자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골단지가 올라갔고, 다음 해에는 따로 일산의 납골당에 모셔져 있던 작은아버지까지 모셔왔다.  온 가족이 다시 합쳐지던 날,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부지, 작은아부지.. 많이 늦었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렇게 하늘나라 가신 뒤에라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해후(邂逅)의 정(情) 먼저 나누시고, 이제는 힘들었던 일 모두 잊고 그곳에서나마 함께 즐겁게 지내시고 행복하세요..‘


시간이 아직은 더 남아있는 듯 하지만,

이제 저 아래 단에는 훗날 나도 들어가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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