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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Jun 16. 2024

존재, 기다림과 망각 속 그 어딘가

아이들의 기억에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슬프다.

둘째야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부모에게 들은 간접적인 말과 사진뿐인 게 당연하겠으나, 큰 아이는 갓난쟁이 때 바로 맞은편 단지에 있던 본가에서 할머니가 낮동안 봐주시며 키워주기도 하셨고, 할아버지가 꽤나 이뻐했는데 말이지.



아버지 생전에 대여섯 살이었으니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는 아이에게는 제법 생각나는 부분이 있을 터인데, 얘기를 나눠보면 잘 기억나는 것이 없는 듯하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이뻐하셨는데.. 이제 훌쩍 타 커버려 성인이 되었고, 조그만 학교 울타리 바깥으로 확장되어 새롭게 맺기 시작한 인간관계라든가,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는 대학생의 뇌리에선 어느새 기억이 날듯 말 듯 한 어렴풋한 존재가 되어버린 게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기억이란 참으로 유한하고 제한적이다.

우리의 뇌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대개의 모든 기억이 저장되어 있지만, 중요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정보는 깊고 깊은 창고 속에 들어가 버리고 시냅스 연결이 끊어져 우린 평소에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간다.  그러다 어떤 상황에 마주치거나 어떤 음악을 듣거나, 어떤 냄새를 맡으면 신기하게도 저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소환되어 생생히 떠올릴 수 있곤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엔 의식을 하고 잊지 않으려, 기억하려 무지 애를 쓰며 살아가도 어느새 온전히 기억나질 않고, 서서히 조금씩 잊혀져가는 기억들도 많이 존재한다.  우리 아이의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기술, 그런 병원이 생긴다면 좋겠다.  평소 좋아하는 분이 아버님의 치매로 너무나 힘들고 맘 아파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슬픔과 공포가 다가왔다.  잊혀져 가는 기억, 왜곡된 망상.. 이런 것들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뇌과학의 영역에서 우리의 기억, 잠과 꿈에 대한 비밀들이 밝혀진다면 그런 세상이 도래하긴 하겠지.



1990년에 필립 K.딕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토탈리콜에서 일찍이 선보인 바 있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강제로 타인의 기억을 심어버리거나, 의도하는 대로 조작해 버리는 SF스릴러 영화는 수없이 많다.


심지어 언젠가 미래에는 (가까운 미래일 수도 있는) 내 뇌의 모든 정보를 클라우드에 업로드하여 네트워크 세계 속에서 이진의 데이터로 현현한 ‘나’는 불멸의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를 무형의 정신과 물리적 육체가 결합된 존재로만 볼 것인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어떤 선이 인간성이 유지되는 한계선일까.


(물론 우리의 뇌를 정밀하게 스캔하고 1,000억 개의 뉴런과 100조 개의 시냅스로 추산되는 그 모든 신경 연락망을 100% 완벽히 복제한다 해도, 그 한 사람의 모든 기억정보가 그대로 옮겨지긴 하겠지만, 살아있음으로써 가지고 있는 ‘의식’까지 생기진 않는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이 의견은 우리 인간의 ‘의식’이란 것이 전자들의 중첩 상태에 따른 양자도약(퀀텀점프)을 통한 양자적 중첩의 작용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는 양자의식 가설에 따른다)



껍데기뿐인 육신이 무의미하다면 온전히 ‘나’로서 사고하는 정신(마음, 영혼)이 변함없이 그대로일 경우, 클라우드에 업로드된 ‘나’는 육신에 갇혀있던 이전의 나와 무엇이 다른 걸까.  오히려 노화와 육신의 죽음을 걱정할 필요 없이, 인류가 고대로부터 그리도 열망하고 종교에 기대던 ‘영생’을 간단히 얻게 되는 건 아닐까.  


네트워크 속의 내 ‘의식(뇌)’는 원하는 대로 기계장치와 연결해서 물리적 공간 속의 현실에서 얼마든지 활동을 할 수도 있겠다. 여럿의 안드로이드, 휴머노이드가 내 아바타로서 움직이는 영화 ‘써로게이트’가 그렸던 그런 세상..  이런 세상이 온다면 지금 하고 있는 우주탐사 연구가 더이상 의미가 있을까.



우리 아이들도 어른이 되어 자식이 생기면, 그 아이들은 오래지 않아 할아버지인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불과 한 세대만 건너뛰어도 그러할진대, 몇백 년 몇천 년의 시간을 달달 외며 공부로만 경험하던 ‘역사’와 달리 조, 증조, 고조, 현조.. 면면이 이어지는 가족과 조상의 역사, 마을의 역사, 이러한 미시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얼마나 많이 버려지고 잊혀져간 것일까.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이 사라져 가는 만큼, 그 아쉬움과 죄책감에 대한 반동으로 나 스스로 아버지란 존재가 되어서 아이들과 겪어가는 모든 일들에, 내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감상이 뒤틀리며 오버랩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잡생각이 많아진다. 허허로운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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