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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의 방향성

[D-354] 색이 없는 게 내 색깔이 될 수도 있다.

by Mooon

D-354. Sentence

색이 없는 게 내 색깔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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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이 없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내 마음에 남아 있던 문장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존재의 농도를 측정한 뒤, 연한 색의 스포이드로 결론을 내린 듯한 느낌. 그런데 오늘, 그 문장을 다시 꺼내보니 예전처럼 아프게 꽂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금은 다른 결로 다가왔다. 박나래님 옆에 있던 장도연님이 그랬다. 초창기에는 더 큰 에너지에 가려져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도연님은 훨씬 명확한 자기색으로 다가왔다. ‘색이 없다’고 고민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 자신만의 ‘결’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늘 스스로를 ‘노멀 중에 노멀’이라고 생각해왔다. 특별히 두드러진 것도 없고, 누가 봐도 대표되는 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하긴 하는데, 그 열심만큼 급격하게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느낌. 그래서 ‘색깔 없음’은 나의 오래된 콤플렉스였다. 그런데 어느 날, ‘슈퍼노멀’이라는 단어가 내 시야를 환하게 열었다. 적당히 평범한 것이 아니라, 평범함 자체가 오히려 가장 단단한 힘일 수 있다는 개념. 그 단순한 단어 하나가 내 마음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았다. ‘아, 무색이기 때문에 더 넓어질 수도 있겠구나.’ 그 이후로 나는 색이 생겨야 한다는 강박보다는, 도망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내 흐름 자체를 '필요 충분한 톤’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대단한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건 없지만, 나를 바라보는 관점은 달라졌다.


올해 하반기, 정말 말 그대로 치열하게 달려왔다. 사업보고서 제출하고, 숨을 한번 고르니 쌓여 있는 일들이 스르륵 드러났다. 밀린 기록로그, 작년 연구비 보고서, 아직 엄두도 내지못하고 있는 대학원 14주분 온라인 강의 제작… 느슨해질 틈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색깔이 없다”라는 고민은 사실, 잠시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고민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나아가야 하는 시기다. 그리고 그 치열함 속에서도 나는 계속 움직여왔고, 또 움직일 것이다.


두 아들이 먼 미래에 말해주었으면 하는 한 문장은 이것이다. “우리 엄마는 참 치열했어요. 힘들어도 멈추지 않았어요.” 그 말이 부끄럽지 않은 삶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살아내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자기 인생을 성실하게 끌고 갈 수 있기를 바란다. 망상이 아니라, 합리화가 아니라, ‘제 인생을 스스로 설계해나가는 멋짐’으로.


오늘 칼바람이 유난히 차다. 몸이 움찔할 만큼 날선 바람이지만, 그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는 걸 떠올린다. 버티고 지나가고, 그러면서 조금씩 단단해졌다. 색이 없다는 이유로 나를 축소하거나 합리화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갑자기 화려한 색의 사람으로 변신할 생각도 없다. 나는 지금의 결과, 지금의 속도로, 내 방식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톤으로.



내 안의 한 줄

무색이라서 더 멀리 갈 수 있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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