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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집을 나서는 여자.

[D-358] 집을 나선 여자들

by Mooon

D-358. Sentence

집을 나선 여자들


@nursedaldal

여자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유의 능력이 있다. 생각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지 않고, 수십 개의 버튼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동시에 켜지는 구조. 오래 전 ‘여성 뇌는 복잡하고 남성 뇌는 단순하다’는 이미지를 보며 너무나 공감했던 이유도 그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집에는 남자가 셋. 자연스레 머릿수에서 밀려 그들을 내가 닮아가고있다. 고등학교 시절 별명이 ‘일반군인’이었던 나는, 요즘 들어 다시 그 시절의 투박함을 닮아가는 중이다. 말투도 묵직해지고, 목소리도 낮아지고. 외형은 조금씩 ‘단단해지는 남성성’으로 이동하는데, 뇌구조는 여전히 섬세하고 복잡한 여성성 그대로라 가끔은 참 서글프다.


요즘 부쩍 듣는 말이 있다. “좀 뻔뻔해져라.” 그만큼 내가 생각이 많고, 타인의 말 한 마디에도 멈칫하며 주춤하는 순간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나도 안다. 이 소심함을 벗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더 크다는 걸. 나는 현모양처도 아니고, 집안을 예쁘게 꾸미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도 아니다. 대신 일할 때 살아나고, 내 일을 통해 에너지가 도는 사람이었다. ‘집을 나선 여자’라는 표현이 아마도 내 성향에 가장 가깝다. 소심하지만 일할 때만큼은 갑자기 활맥이 서는 대장부. 그러고 싶고, 실제로 그러려고 애쓴다.


내 마음속 이상적인 나는 ‘중성적이고 시크하지만 따뜻한 워킹맘’이다. 움직임에 따라 딱 떨어지는 날렵한 어깨선. 은근하지만 단단한 근육. 꾸안꾸인데 멋이 흐르는 스타일. 클라이언트와 파트너들을 향해 당당하게 설득하는 여장부 같은 나. 현실의 나는… 유산소 운동만 꾸준한, 근력운동은 늘 머릿속에서만 하는 사람. 겨울옷들이 눈에 밟힌다. 지금 내 스타일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 겨울은 옷장 안의 옷들로 잘 입어보자고 마음을 다독인다. 나 자신에게 늘 조금은 후하고,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위로가 필요한 모순적인 포지션.


어제 기분 전환 삼아 오래된 지갑들을 꺼내보았다. 생각보다 많이 가지고 있더라. 조금은 낡았지만, 분명 내 취향이 살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나다움’이 그 사이에 잘 보관되어 있었던 걸지도. 그래서 다시 생각했다. 내면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외면도 결국 나의 일부라는 것을. 나는 그걸 무시하지 않고 꾸준히 가꾸며 살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내일부터는 몇 가지 루틴을 다시 잡아볼 예정이다. 늘 그렇듯 문제는 ‘내일부터’라는 점만 빼고. 조금은 단단해지고 싶고, 조금은 더 뻔뻔해지고 싶고, 조금은 더 나다워지고 싶은 마음. 집 안의 역할에 묶이지 않고, ‘일하는 나’와 ‘살아가는 나’를 동시에 품고 싶은 마음. 그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다시 나를 회수할 기회를 찾는 마음. 그 모든 감정이 오늘의 문장을 만든다.



내 안의 한 줄

밖으로 나설 때, 잃었다고 믿은 ‘나’를 다시 줍는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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