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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는 기쁘다.

_ 남오

by small girl


어른이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줄 알았다.

내 부모는 어려서부터 이혼을 했고 난 기억이 흐릿한 시절부터 혼자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 질문이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들 한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은 아닌가 보다. 나는 답이 없는 보기를 두고서 처음에는 기다림으로, 후에는 분노와 원망, 지금은 체념과 자유로움을 택했다.

남들과 다른 환경이라는 이유로 당연한 것들을 누리지 못했고 가난해도 내 힘으로 버텼다. 그래도 타고난 체격과 내 목숨보다 소중한 조부모의 사랑이 날 지켰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야. “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런 불씨 같은 할머니의 사랑으로 나는 세상을 원망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었고 중학생이 되자마자 돈벌이를 시작했다. 돈과 현실은 아주 밀접한 관계라는 걸 그때부터 알게 된 거다.

굽어가는 할머니에겐 사랑 말고는 더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날 가슴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를 살아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아직은 어리고 약한 나에게 어둠의 손길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래보다 타고난 체격을 가져서 힘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며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그 불씨 같은 사랑은 어둠으로부터도 날 지켜냈다.

그 길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고 그 사랑이 헛되지 않도록 떳떳한 길만 걷고 싶었다.


내 부모가 나에게 가르쳐준 건 혼자 살아가는 방법뿐이었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살아있는 한 잠시 잊을 순 있어도 늘 마음 한편이 무거울 거라는 걸. 그래서 그들과 다르고 싶었고 나 혼자서도 잘 지내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들의 책임을 내가 지고 있다고. 나는 책임질 줄 안다고.


그렇게 난 운동을 배워서 나를 지키는 것에서만 힘을 썼고 공부머리는 아닌 것 같으니 나중을 위해 기술이라도 배울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어렸지만 생계를 위해 외로움도 외면했다. 먹고 자고 돈을 위해 살기를 반복할 땐 이렇게 지치는 삶이 영원할 줄만 알았다.

세상은 날 비웃듯 쉽게 포기하지도 못하게 한다. 그렇게 고생을 하게 하다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오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래 친구들보다 나는 참고 인내하는 것들에 익숙했고 배움에 간절했다.

다들 연애를 하고 여자에 눈을 뜰 때 나는 나를 위해, 내 미래를 위해 눈을 떴다. 그래서 삼 년 내내 친구들이 따르는 리더가 되어있었고 성적이 좋았다. 처음이었다.

무리가 생기고 그 안에서 인정이라는 걸 받아보니 삶이 재미있어졌다. 더 해보고 싶었다.


그때 그 나이엔 어느 곳에나 꼭 있을법한 짓궂은 친구가 있다. 어느 날은 친구가 내 가정을 들먹이며 장난을 가장한 놀림을 했다. 학교 내에서 누구에게도 인정받아 본 적 없는 그 친구는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는 듯 아니면 흐트러짐 없어 보이는 내 모습에 자격지심이라도 느꼈던 듯, 끝까지 날 물고 늘어졌다.


“엄마아빠도 없는 놈이 잘난 척 하기는.”


그 순간, 난 의자를 집어던졌고 정확히 그 친구의 머리를 향했다.


울컥했다.


날 가난으로 몰아넣고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게 했으며 굽어가는 할머니에게 늘 죄송한 마음을 품고 살게 만든 그들은 내가 의자를 던지게 만들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난 건 축복이 아닌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 같은데, 그 시작을 만들어준 이들을 욕보이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미워해도, 욕을 해도 나만 할 수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난 그들을 기다렸고, 그러다 미워했고, 이제는 용서하고 싶은 것 같다. 힘듦은 그저 힘듦으로만 오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 길 속에서 나는 남들과 다른 성숙함을 배웠고 지금의 나를 인정받게 했다.


분명히 모든 시간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 속에서 나는 빠르게 어른이 되었고 대부분의 일에 의연함과 기대하지 않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친구가 일깨워준 일말의 불편한 이 마음까지 털어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렇게 난 많은 것들을 얻고 또 털어내며 마음으로도, 보이는 숫자에 불과한 나이로도 어느덧 진짜 성인이 되었다. 진짜 자유다.


그리고 사랑을 갈망하게 하는 공허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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