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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jiya Sep 05. 2024

시베리아 호랑이의 반전

서희가 손뼉 쳐줄 아빠의 담판, 그러나...




   아이의 어린이집 시절부터 지금까지 학부모 상담 때마다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좋아하는 것에는 매우 적극적이고, 아닌 것에는 건성이라는 것.  


사회성 부족과 함께 애옹이(아들의 애칭)의 독특한 성향의 또 한 가지는 특정 분야에 몰두하는 것이다. 요즘 말로 '덕후(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변형해 줄인 말로, '마니아'를 뜻함)'라고 할 수 있다.


세 살 무렵 ‘국가와 국기’라는 책을 보면서 한글도 모르던 애옹이외웠던 국기가 150개 이상인 것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천재인가?’하고 감탄했다.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세인트키츠네비스. 생경한 나라 이름들을 야물딱진 발음으로 읊어내던 목소리와 리듬감이 지금도 귓가에 선명하다.   


            




   아이에 대한 나의 행복회로는 항상 남편이 스위치를 꺼주곤 했다. 이렇게 제한된 분야, 특히 도식화나 체계화된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아스퍼거 증후군'의 한 특징이라고 하니, 도대체 그건 누가 그렇게 정의해 놓은 것인지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저 일곱 글자가 애옹이의 삶은 외롭고 불행할 거라고 단정 짓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보아도 애옹이는 확실히 그런 것들에 강하게 끌리고 몰입하는 경향을 보였다. 지하철 노선도를 시작으로 ‘철도 덕후’가 되었고, 고양시에 소재한 ‘서오릉’ 역사문화관의 한쪽 벽면을 차지한 조선의 왕실계보도를 보고 홀린 듯이 빠져들어 ‘역사 덕후’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스퍼거? 그래 뭐, 그렇다 쳐. 다 커봐야 아는 거지.’      


나는 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목적지 없는 지하철 여행을 함께 다녔다. 새로운 노선이 개통되면 아이와 둘이서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고, 친정엄마 보러 일본에 가면 타고 다닌 덴샤(전차) 비용이 비행기 값을 상회할 정도였다.


역사를 좋아하게 된 후에는 궁이나 능 같은 국가유산(구, 문화재)이나 사적을 목적지로 해서 철도여행을 다녔다. (두 세계관의 만남이며, 일거양득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해주는 것이 가장 행복한 나는 누가 뭐래도 아이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애옹이의 최신판 핸드메이드 노선도






   '사회성 부족한 덕후' 애옹이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자기 관심분야가 나오면 말을 참지 못하고, 불쑥 의견을 말하거나 질문을 해서 또 여러 사람에게 미움을 샀다. 중학교 2학년 초, 담임선생님과의 전화상담 중에 나는 회사 화단에서 사연 있는 여자처럼 울고 말았다.     


 "어머니, OO이가 자꾸 수업시간에 말을 해요."


 "아... 네... OO이가 자기 의견을 잘 얘기하는 편이에요."


 "근데, 수업에 방해가 돼서 아이들도 불만이 있고, 선생님들도 불편해하세요."


 "아... 네... 그렇죠... 우리나라 수업방식에 맞지 않죠..."


 "OO이가 뭐 외국에서 살다 왔나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요..."

 

 "그리고 자꾸 낙서를 해요. 며칠 전에 벽에 낙서하려고 해서 제가 못하게 했거든요."


 "네....?"


 "자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제가 똑똑히 봤어요."


말문이 막혔다. 선생님들이 다루기 쉬운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는 아이를 완전히 잘못 키운 것이다. 낙서쟁이에 수업방해꾼이라니... 우는 나를 위로하듯 선생님이 말했다.    

 

“위센터 상담이라도 연결해 드릴까요?”    

 

“네. (훌쩍훌쩍)    


전화를 끊고 나서 울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옹이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되나 봐. (훌쩍훌쩍) 어쩌구저쩌구... (훌쩍훌쩍)      


            



남편의 K-부모테스트 결과(너무 잘 어울림)



 “근데, 효지야. 애옹이한테 물어봤어? 애옹이 말도 들어봐야지.”


엇!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당장 아이에게 전화해서 시베리아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릴 남편이 애옹이를 두둔한다. 갑자기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러네? 나는 항상 아이를 믿는다고 했으면서 정작 지금 선생님의 말만 듣고 울며불며 아이를 키운 십여 년을 허사로 치부했다. (사람들은 그날 내가 큰 회계사고라도 쳤냐면서 수군거렸다고 한다.)      


남편의 추측대로 낙서에 대한 부분은 선생님의 오해가 있었다. (애옹이는 거짓말이 매우 서툴.) 그리고 아이 딴에는 선생님이 유독 자기에게만 '급발진'을 한다면서 억울해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이 방문 상담을 신청했다.   

  

 “거 봐. 애옹이 그런 애 아니야. 너는 왜 울고 그래?"


 "......"


 "애옹이 학기 초부터 또 문제아로 찍힌 것 같아. 정말 끝이 없다... 내가 가서 분위기 반전시켜 놓고 올게. 나만 믿어.”


 "아니, 뭘 어쩌려구? 괜히 가서 싸우고 그럼 안 돼..."          


     




   아빠의 등판에 악성민원을 우려한 담임선생님은 학년부장선생님을 대동했다. 평소 멀끔한 외모와 댄디한 스타일로 특히 중년 이모들의 호감상인 남편은 1차 관문을 통과해 오픈된 공간인 학년부실에서 조용한 별도의 상담실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늘 저자세로 서툴고 부족한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린다며 굽실거리던 나와는 달랐다. 아이의 특이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 부분을 엄격하게 잡아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러이러한 장점이 있고, 집에서는 아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어필하고 왔다. 나에겐 정말이지 문화충격이었다.

   

“선생님, 저희 아이 독특한 면이 있지만 착하고 영리한 아이예요. 선생님이 문제아로 보시면 얘는 문제아로 남겠지만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이끌어 주시면 분명히 잘 따라갈 거예요. 그런 순수함이 또 있는 아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집에서도 잘 지도하겠습니다.”     


마침 학년부장선생님의 자녀가 애옹이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어서 많은 부분을 공감해 주셨고, 오히려 담임선생님을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셨다고 한다. 

   

“아니, 저는... OO이를 문제아라고.. 전혀..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남편은 정말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아이는 담임선생님과의 관계도 회복했고, 아이들에 대한 애착으로 다음 해에도 3학년을 맡아주신 부장선생님의 관심 속에서 중학교 생활을 무사히 잘 마쳤다.     


아이에게 늘 다그치고 엄격했던 남편은 마냥 짜증쟁이는 아니었다. 나보다 아이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챙겨주고,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하면서 아이를 든든하게 지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나는 내심 남편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빠의 사랑은 결은 좀 달라도 크기는 다름이 없었다.


그럼 이제 학부모상담은 남편 네가 가는 걸로. 






# 번외 스토리


   아빠의 방문에 담임선생님과 학년부장선생님은 학기 초 애옹이가 제출한 가정환경조사서(사실 정확한 명칭이 생각나지 않지만)를 준비해오셨다고 한다. 아마도 아빠가 '진상'일 경우를 대비하셨을 것으로 헤아려진다. 상담의 끝자락에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얘기를 꺼내셨다.


 "근데 아버님, 저희 아이도 애옹이랑 비슷한 성향이 있는데, 그거대로 장점이 있으니 너무 잡지 마세요. 애옹이가 아버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제출했어요."


1. 엄마와의 관계: 최상, 상, 중, 하

2. 아빠와의 관계: 최상, 상, 중,


 "아......" (입이 있지만 할 말이 없는 남편)


 "처음 봤어요. 애들이 보통 안 좋아도 '중'에는 체크를 하거든요. 관계 회복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아... 네... 하하..."


나는 내 자식을 갈궈도 남이 갈구는 꼴은 못 보는 남편은 애옹이의 펜 끝에서 나온 '하'라는 어퍼컷을 씨게 한 방 맞았다.


 "너네 둘이 살어. 난 이 집구석을 나갈란다. 내가 창피해서 진짜..."


선택지에 '최하'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나는 안다. 애옹이가 시험 잘 본 날이면 항상 엄마보다 아빠에게 먼저 전화했다는 걸. 요즘은 도통 그런 일이 없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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