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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가리비 오던 날

by 데이지

가을이 되면서 가리비를 한번 먹어야지 머리로만 되뇌다 계절이 바뀌도록 잊고 지냈다. 아마 큰딸이 있었으면 몇 번을 사다 먹었을 텐데 먹자고 재촉하는 딸이 없으니 생각만 하다 제철을 놓쳐버렸다.

제철 음식을 챙겨 먹는 것도 부지런해야 하는구나! 음식도 신경 쓰지 않으면 늘 먹던 대로만 먹게 된다.


월요일 아침 올케언니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무슨 일일까 싶어 전화를 했더니 이번엔 언니가 바쁜지 통화가 안 된다. 급한 일이면 다시 연락을 주겠지 하는 생각에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가리비를 보냈으니 토요일에 도착할 거리고, 도착하면 오빠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하라는 문자가 왔다. 갑자기 왜 오빠가 가리비를 보냈을까? 궁금했지만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저녁에 전화 했다.

통영에서 가리비를 시켜 쪄 먹다가 오빠가 예전에 내가 가리비를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나서 막내가 가리비 참 좋아했는데라고 한 마디 했고, 함께 있던 언니가 그럼 보내주면 되지 하면서 그 자리에서 택배로 주문을 했다는 거다. 어쨌거나 생각지 못한 가리비를 먹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통화를 끝냈다.


11월부터 제철인 가리비는 참 맛있다.

올해는 생각만 하다가 지나치나 했는데 오빠와 언니의 한 조각 추억 덕분에 가리비를 먹게 되다니 고마운 일이다. 오빠와 전화를 끊고 작은딸에게 말했더니 딸이 묻는다.

"나는?"

"너는 특별히 먹어도 되지! 우리 오빠가 보내준 거니까." 했더니

"삼촌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럼 그래라!"

하고 웃었다. 삼촌을 우리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지 않다는 표정이다. 엄마도 든든한 내 편이 있단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도 자랑삼아 가리비 이야기를 했다. 남편도 잊고 있던 가리비가 생각났는지 형님 덕분에 먹는다고 좋아한다.


음식은 다 같이 공감하는 행복이 아닐까?

기쁜 날 좋은 사람과 함께 나누는 음식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극치를 준다. 그뿐 아니라 지치고 힘든 이에게는 위안을,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에게는 위로를 준다. 때로는 어설픈 말 한마디보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순간을 털어버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치유가 되기도 한다.

특별하지 않더라도 매일 먹었던 음식이 마음을 다독여 주는가 하면, 눈물 쏙 빠지게 맵고 알싸한 음식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어 주기도 한다. 음식은 풀리지 않던 관계들을 회복시키는 마법의 열쇠가 될 때도 있고, 오늘 먹었던 따뜻한 국밥 한 그릇으로 다시 힘을 얻기도 한다.


토요일쯤 온다던 가리비가 하루 앞당겨 금요일 아침에 도착했다.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에 담긴 오빠 언니의 마음을 문 앞에서 마주했다. 기쁜 마음을 나누려 딸을 깨우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딸은 대꾸조차 없이 잠에 취해 있다. 박스를 열어보니 얼음과 바다내음 가득한 싱싱한 가리비가 한가득이다. 냉장고에 넣기에는 양이 많아 박스째로 세탁실 서늘한 곳에 놓아두면서 저녁이 기다려진다. 저녁거리가 해결 됐으니 덩달아 마음도 넉넉해진다.


처음 가리비를 먹게 된 것도 오빠네 때문이었다. 친정에 갔을 때 가리비가 제철이라며 사 와서 석화와 같이 쪄 먹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석화를 씻고 찜기에 찌는 일도 오빠가 했다. 커다란 찜기에 한판을 쪄 내오면 우르르 달려들어 뜨거운 석화와 가리비를 들고 한알씩 빼먹는 맛이 참 좋았다. 소금을 넣지 않아도 짭조름한 속살에 초장을 살짝 찍어 씹으면 살이 탱글탱글 맛이 그만이다.

가리비도 석화도 껍데기가 커서 여럿이 하나씩 집어가고 나면 금세 푸짐했던 찜기는 비어버린다. 아이들은 먼저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와 아빠, 고모나 이모 삼촌부터 먼저 챙겨야 하니까 찜기 첫 판은 한 두 알이 고작이고 아쉽기만 하다.

첫 번째 판은 두 번째 판이 쪄지기도 전에 동이 나버리고 아이들은 석화를 먹느라 걷어붙인 팔을 하고는 빨리 달라고 성화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몇 번 더 찜기의 석화가 비워져서야 모두들 흡족한 얼굴들이 된다.

많은 양을 한 번에 찔 수 없으니 나누어 찌는 석화와 가리비가 시간의 기다림과 적은 양의 아쉬움이 합쳐져 그 맛은 배가 된다. 또 세대가 둘러앉아 나누는 기쁨, 웃어른부터 드려야 한다는 생활예절까지 배우는 자리가 되곤 했다. 그때부터 생굴을 싫어하는 딸들도 쪄먹는 석화나 가리비의 맛을 알게 되었다.


저녁에 가리비를 네 번에 나누어 쪘다. 셋이 먹기에 부족함이 없고 기다릴 필요도 없이 넉넉하다. 딸은 관자가 크고 탱탱한 가리비를 접시에 담고 초장을 살짝 뿌려 수저로 퍼먹더니 눈은 초승달이 되어간다. 여럿이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손놀림이 빨라져야 했던 때와는 다른 호사를 누린다. 맛있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크덕이며 또 한 수저 입안 가득 넣는다. 볼이 빵빵하도록 집어넣고 맛나게 씹는 딸에게 가리비를 수저로 떠먹는 이는 너뿐이라고 했더니 웃는다.

오빠와 언니의 마음이 담긴 가리비로 딸과 함께 푸짐하게 먹은 저녁이었다.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해산물을 좋아하는 큰딸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먹었던 시간도 생각나게 한다.

오늘 넉넉하게 먹었던 가리비는 오빠의 마음에 있던 어머니를 내게도 보내준 선물 같은 음식이다. 함께 나누며 즐거웠던 한 때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가리비와 함께 오빠로부터 우리에게로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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