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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언제쯤이면 진정한 도민이 될 수 있을까요?

by 데이지 Mar 05. 2025

추운 겨울엔 새콤한 귤이 제맛이다.

어린 시절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 배를 깔고 누워 새콤달콤한 귤을 까먹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껍질 까는 것이 귀찮아지면 이불 밖으로 손만 빼꼼히 내밀어 할머니가 까 주시는 귤을 받아먹곤 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상자 가득했던 귤은 하나둘 사라지고 금세 밑바닥을 내보인다. 상자 비우기를 두세 번, 새콤했던 귤맛이 심심해질 즘이면 매섭던 바람도 순해지는 봄이 찾아올 시간이다.


이른 봄 제주로 내려오던 해에 노란 컨테이너 가득 한라봉을 받았다. 이미 귤은 제철이 지난 뒤였기에 한라봉을 먹어보라고 주셨다. 귤보다 몇 배는 커다란 한라봉을 감사하게 받아 하나씩 신문지로 감싸 보관해 놓고 봄내 먹었다. 상큼한 맛이 생각나서 먹고, 할 일 없어서 심심해 먹고, TV를 보면서도 먹고 먹었다.

한라봉은 솟아난 꼭지가 한라산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겉은 시들한 것처럼 보여도 속은 알알이 탱글탱글 살아 있어서 과즙이 풍부하다. 만감류에 속하는 한라봉은 후숙 과일이라 수확하고 며칠이 지나야 신맛이 없어지며 단맛이 난다고 한다. 지금이 신맛이 빠져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시기다. 그래서인지 봄부터 오월까지 먹었던 큼지막한 한라봉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생소하기만 한 제주에서 새로 만난 친구같이 늘 옆에 두고 오래도록 먹었던 한라봉이 제주의 맛이고 첫인상이다.

뜻밖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편의 지인이 먹어 보라며 한라봉을 한 상자 가득 주셨다. 상자 덮개도 닫지 못할 만큼 가득 담긴 한라봉을 만나니 반가움에 입꼬리가 절로 춤을 춘다. 나무에서 바로 따왔다는데도 후숙 된 것처럼 신맛이 적당하고 달콤하다.

귤에서 한라봉까지 챙겨주시는 이웃사촌이 하나 둘 늘어나 정이 쌓이고 그 덕에 봄 햇살처럼 마음은 부자가 됐다.

이쯤 되면 도민으로 잘 지내고 있는 것 아닐까?


귤의 섬 제주로 이주한 지 올해로 7년이 되었다.

우시게 소리로 이주민에게 진정한 도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보는 질문이 둘이다.

하나는 제주시에 살면서 서귀포를 얼마나 멀게 느끼고 있느냐는 것이다. 멀다고 느낀다면 잘 적응해 도민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여전히 뷰 맛집 카페나 식당을 찾아다니는 것을 즐긴다면 아직은 진정한 도민은 아니라는 말이다.

해를 거듭해 살다 보니 제주시에서 한 시간 내외의 서귀포시를 도민들이 멀게 느끼는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한라산을 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라산은 높은 고도로 날씨 변수가 많아 폭설이나 폭우, 강풍으로 도로 통제를 하기도 한다. 통제가 되면 해제가 되기 전까지는 갈 수 없는 곳이다.

관광객이 제주로 여행 왔다가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결항되면 꼼짝없이 섬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히는 것처럼 서귀포도 가고 싶다고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자연과 한라산이 허락을 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한라산은 구름, 바람, 비, 눈, 안개 모두를 품은 웅대한 산이다.

또 고지대의 구불구불한 숲길은 사고가 많고 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블랙홀 같아서 뭐든지 삼켜버릴 것만 같다. 한 번 빠지면 영영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곳이 한라산이다. 그래서 거리보다도 심적으로 더 멀게 느낄 수밖에 없는 속내가 숨어 있었다.

또 다른 질문은 귤을 마트에서 사 먹는지 여부다. 돈을 주고 사 먹는다면 아직은 도민이 아니고 주변 지인으로부터 받아먹는다면 도민으로 적응을 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제주는 나눔의 문화가 생활 곳곳에 배어 있다. 섬 특유의 퉁명스러움도 있지만, 정이 많고 인심도 후한 섬이다. 그래서 귤을 사 먹는다는 말은 이웃과 교류 없이 지낸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웃과 어울려 지내지 못한다면 진정한 도민이 아닌 것이다.

몇 해 전부터 기온 변화로 수확량이 매년 줄어들며 이젠 귤도 귀한 과일이 되었다. 특히 작년에 기암 할 정도의 폭염과 잦은 소나기로 수확량이 더 줄었음에도 여전히 지인들로부터 귤을 받고 있다.  

이주민들은 육지 생활에 두고 온 가족이나 형제들, 지인들과의 인연으로 육지를 자주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생긴다. 그럴 때 제주 생활을 멈추고 한동안 육지 생활이  길어지기라도 하다면 오롯이 한곳에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아 나조차도 도민인지 외지인인지 불분명 해진다. 사정이 여의치 못한 이들은 종종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어느 곳이든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정착하고 살아야 한다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힘들고 지치지 않을 정도로만 부대끼고 애쓰면 좋겠다. 나 자신의 속도를 맞춰가며 천천히 내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한가?

입춘이 지난 지 한참이다. 아직도 코끝을 에는 알싸한 꽃샘추위를 핑계 삼아 친구 같은 한라봉 한 바구니를 들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제주의 맛을 보려 한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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