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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by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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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열대야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설치다 지쳐 새벽녘에야 선풍기 바람에 잠깐 눈을 붙였다.

아침부터 덥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또 얼마나 더울지 연신 갱신되는 폭염과 열대야에 하루하루 보내기가 힘들다.

해처럼 더웠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여름 중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는 어마무시한 예보가 나왔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 생태계 파괴, 극단적인 기상현상, 폭염 등 자연파괴로 인간이 초래한 결과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덥다 못해 폭염이 계속되는 날씨에 실내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생기를 잃어가는 나무처럼 삶이 지쳐서 시원한 자연 비자림숲을 찾았다.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고 놀다 오면 시원한 미숫가루를 타 주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처음 암 수술을 받고 제주에 오셨을 때 형제들과 함께 왔던 곳이라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숲이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고 비가 쏟아질 것 같으니 우산을 준비하라는 안내원의 말대로 우산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햇볕을 피하며 소공원을 지나 천년의 숲 비자림으로 들어서니, 주변은 온통 푸르고 울창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시원했다. 에어컨과 비교할 수없이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화산석 자갈을 밞을 때마다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도 좋았다. 아름드리 비자나무 사이로 다람쥐나 청설모가 있는지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비자나무 열매를 다람쥐가 좋아할까? 좋아한다면 분명 다람쥐가 볼 안 가득 비자나무열매를 숨기고 있을 텐데. 다람쥐야 어디 있니?


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쯤이야 커다랗고 긴 나뭇가지가 빗방울도 다 막아줄 것만 같았다. 조금씩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우산을 쓰고 걷던 길을 멈추게 할 정도로 거세졌다.

우린 큰 나무뿌리에 발을 올려놓고 비가 소강되기를 기다렸다. 순식간에 내린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기도 전에 커다란 물줄기를 만들어 흐르기 시작했다. 발을 딛고 걸었다간 금세 운동화가 물에 잠길 기세다.

흐르는 물을 피해 나무뿌리를 밟고 있었지만 위태위태했고, 같이 쓴 우산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은 어깨를 타고 등과 팔을 적셨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튄 물들이 운동화뿐 아니라 바지까지 적시며 올라왔다. 누가 봐도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한 참을 기다려도 빗줄기는 잦아들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젖은 길에 비를 맞고 가자는 남편과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나, 갈라진 의견으로 옥신각신할 때 딸이 10분만 더 기다렸다가 비가 그치지 않으면 그때 가자고 중재에 나섰다. 그렇게 10분쯤 지나 조금 잦아든 빗속을 걸으며 바지는 돌돌 말아 올려 반바지를 만들었고, 운동화는 물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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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아든 빗속을 뚫고 비자나무를 우산 삼아 걸으며 한바탕 날궂이를 했다.

어릴 적 비 오는 날 비를 맞으며 학교운동장에서 실컷 놀고 집에 가면, 엄마는 혼을 내시며 감기 걸린다고 얼른 옷을 갈아입으라고 하셨다. 할머니를 방패 삼아 안방으로 들어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뽀송뽀송해진 몸으로 까슬까슬한 홑이불을 덮고 누우면 참 좋았다. 누워서 안방문을 통해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었다. 철없이 좋기만 했었던 때다.

엄마가 된 지금 생각하니 건조기도 없던 시절이라 비 오는 날이면 빨랫감이 많아지는 것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아이였던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저 혼내는 것만 야속해할 뿐이지.

어른이 된 지금 엄마의 꾸지람도 할머니의 역성도 그립다.


비를 홀딱 맞았지만 새천년 비자나무와 사랑나무를 보면서 딸은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 같다고 한다. 비자나무가 다른 나무에 비해 여러 갈래의 가지가 있어 그런 생각을 했나 보다.

숲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에 숲 해설사가 먹어보라고 준 비자열매를 까먹으면서 옛날에는 구충제 대신 먹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몬드 맛이 나는 비자나무열매가 구미호의 여우구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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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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