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생. 나는 물수능의 시초라고 불리는 그 수능의 피해자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ㅋㅋ) 시험을 치르고 점수가 나왔을 무렵 원래 가고 싶었던 과엔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차선으로 '물리치료학과'에 지원했다. 원서를 제출할 때 담당자들이 "이 정도 점수면 장학금도 받을 수 있어요"라고 할 정도로 하향 지원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모두 불합격. 옆 반 선생님이 작년에 신설된 과가 있다며 넣어보라고 했던 전문대 한 군데만 합격했다. 이름하야 '유아특수치료교육과'(물리치료학과를 지원한다고 하니까 치료가 들어간 과를 추천해 주셨던 것 같다.) 재수를 할 형편도 다시 공부할 마음도 없었던 나는 그냥 그 학교에 가기로 했다. 어떤 공부를 하는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유아특수치료교육과'는 장애 영·유아 전담 교사를 양성하는 곳이다. 졸업하면 장애전담어린이집 특수교사가 되거나 치료사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해 개별 치료를 할 수 있다.
졸업 후 장애전담어린이집에 취직했다. 당시만 해도 발달 장애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거의 본 적 없었다. 교생실습을 갔을 때 처음으로 발달장애 아이들을 만났을 정도였다. 장애 전담 어린이집에 그렇게 많은 장애 아이들이 있는 것에 놀랬고 장애 전담 어린이집에 전국에 수없이 많다는 것에도 놀랐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모르는 게 많다.
내가 취직한 어린이집의 선생님들은 모두 여자였는데 그중 그나마 키가 크고 골격이 장대했던 내가 힘이 세고 공격성이 강하며 돌발행동이 많은 아이들을 담당했다.
발달장애 아이들에겐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어렸을 때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정해진다.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하나 모두 다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내가 과연 이 중요한 시기의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늘 있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이 아이에게 맞는 교육을 한 건지, 그때 아이에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아까 팔을 너무 세게 잡은 건 아닌지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했다. 대학에서 배운 2년짜리 지식으로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관련 공부도 더 하지 않았다. 매일 쳇바퀴 돌아가듯 주어진 일들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아이들과의 시간이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힘들고 지치고 때론 죄책감을 느끼는 시간들을 견뎌내야 했다. 지금은 이런 죄책감이라고 가지고 있지 시간이 지나 무뎌지면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는지,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일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담임으로 있던 한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아이의 엄마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익사했다고 했다. 아이와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떠올라 너무 슬프고 꺼이꺼이 울고 있는 아이의 엄마를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이런 생각이 쓱 올라왔다.
'이제 ㅇㅇ이 엄마 편해지겠다.'
마음속에 감쳐 둔 편견이 있었다. '장애 아이를 둔 부모들은 불행하겠다.'라는 것. 장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몸도 마음도 힘들고 지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에게 장애가 없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매일매일 수만 번 할 거라 생각했다. 아이가 죽어서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래도 이제 몸은 좀 편해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내가 좀 싫었다.
너무 어렸고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아이를 낳은 적 없는 20대 초반의 여자에겐 그 모든 게 혼란스럽고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는 이 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2년 만에 그곳에서 도망쳤다.
임신했을 때 아이에게 장애가 있을까 걱정했다. 만약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도 고민했다. 둘째 임신했을 때 나이가 30대 중반이어서 그런지 이것저것 추가 검사하라는 게 많았다. 대부분 장애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였다. 신랑과 이야기했다. 이런 검사들을 해서 장애가 있다고 하면 안 낳을 거야?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서 검사들을 받지 않았다. 장애가 있던 없던 그냥 우리의 아이인 것이다. 아이를 낳아보니 그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여전히 나는 장애를 가진 가족을 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이럴 거야~, 저럴 거야'라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내가 그들의 삶을 단정 지으면 안 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