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는 ‘갑자기’가 아닐 때가 대부분이다.
며칠째의 불볕더위. 올림머리를 즐겨하는 나에게 요즘 날씨에는 무조건 뒷목덜미가 시원하게 드러나는 올림머리가 딱이다. 아침부터 불볕더위의 기승이 집안을 덮쳤다. 머리를 감고 슝슝 드라이를 재빠르게 한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뜨거운 드라이기 바람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내 젖은 머리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당연히 오늘도 올림머리다’
나는 늘 애용하는 자개집게핀을 능숙하게 집어든다.
올림머리를 좀 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올림머리의 핵심은 ‘무심한 듯 세심한 스타일’.
정수리의 볼륨, 귀엣머리, 뒤통수의 곡선까지 은근히 완성도가 필요하다. 그 중심에는 집게핀이 있다. 보기엔 예쁘고 튼튼해 보여도, 실제로는 고정력이 전혀 없는 핀들도 허다하다. 그래서 기능과 취향을 모두 충족시키는 집게핀을 만나게 되면, 그것은 나만의 ‘애정품’이 된다.
툭!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나의 애정핀이 두 동강 나 버렸다.
급히 서랍을 뒤져 여분의 집게핀을 꺼내어 머리를 고정해 보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정력도, 디자인도, 손에 익은 감각도 어딘가 어설프다. 그래도 이런 날씨에 풀어 내릴 순 없다. 대충 머리를 틀어 올리고 나섰다.
‘고정력과 디자인이 좋은 올림머리 집게핀’
쿠팡 검색란에 치고는 내 손과 눈이 바빠진다. 그간의 시행착오 덕에 금세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골라냈다. 물론 사진상으론 좋아 보여도, 결국 내 머리카락을 실제로 딱 잡아보아야 진짜인지 안다. 역시 쿠팡, 다음날 도착 예정.
그날 저녁.
두 동강 난 집게핀에게 작별을 고하려 재활용통 앞에 섰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
‘아, 이건 갑자기가 아니었지.’
어느 순간부터 그 핀을 머리에 꽂을 때면 아주 살짝, 그전과 다른 감각이 느껴졌었다. 집게핀을 누르는 손끝에서 전해지던 미묘한 불안감. 때때로 들리던 작고 낯선 딸칵 소리. 무시해도 괜찮을 듯해 그냥 넘겼던 신호들.
그리고 오늘, 결국 툭.
나는 ‘갑자기’라고 순간 당황했지만, 결국 갑자기가 아니었던 것. 이미 오늘을 감지할 수 있는 시그널을 여러 번 보내왔던 것이다.
툭, 결국은 예고된 일이었다.
문득 떠오른 또 하나의 기억.
수년 전, 식당에서 한정식을 먹다가 밀전병을 씹는데 뭐가 딱 씹혔다. 순간 놀라서 뱉어보니 이상한 철조각 같은 것이 있었다.
“여기요!”
직원분을 급하게 불렀다(친절한 목소리는 아니었겠지 그 순간). 그리고는 1초 2초나 지났을까. 혀로 어금니 쪽을 스치다가 낯선 구멍에 혀 끝이 쏙 빠진다.
앗, 이미 직원분은 내 앞에 ‘무슨 일이 신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니, 아니에요. 죄송해요.”
나는 급 공손하고 민망한 표정으로 얼버무린다. 센스 있게 반찬리필을 정중하게 청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텐데.
아주 오랫동안 어금니 치아와 한 몸이 되어 있던 부분보철이 ‘갑자기’ 빠져 버렸던 것이다. 갑자기 빠져버린 보철물. 그 보철물도 사실 ‘갑자기’ 빠진 게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혀끝에 느껴지던, 말할 수 없이 미세한 들뜸.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설마’ 하고 넘겼던 그 감각.
'갑자기'가 '갑자기'가 아닌 것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는 ‘갑자기’ ‘별안간’ ‘뜬금없이’ 등등. 뭔가 생각지도 않았던, 예상치도 않았던,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이런 말들을 붙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양손을 과하게 들어 올린다.
그런데 정말 그 모든 일들이 '갑자기'였을까!
우리는 알고 있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 순간 찾아오는 이상한 감정, 자주 반복되는 미묘한 피로. 하지만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덮어두다가 결국 툭!
그리고 당황하며 외친다.
“갑자기!”
나는 왜 이런 시그널을 무시했을까?
그래, 알고도 모른 척하며 넘긴 적이 많았었다. 그 안의 웅크리고 있던 두려움이었을까. 불안이었을까. 직면하고 싶지 않은 감정. 그 감정에 빠지고 싶지 않아 도망쳤던 것은 아닐까.
‘갑자기’는 대부분,
정말 ‘갑자기’가 아니다.
그 전의 그 작은 시그널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갑자기!’하며 당황하는 그 순간을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비단 머리핀뿐이겠는가. 관계도 일도 건강도 그리고 내 마음도. 우리는 그 작고 조용한 시그널들을 알아채야 한다.
다음날, 퀵배송으로 내 손안에 새로운 집게핀이 들어왔다. 긴 머리를 둘둘 하나로 말아 올리고 새 헤어핀을 조심스럽게 벌려 딱 머리를 집어 본다. 그래 딱 이 느낌이다. 순간 안도의 마음이 든다.
"그래 너로 정했어. 새로운 예쁜이, 반갑다.
너에게 맡길게. 나의 머리. 앞으로 잘 부탁해!"
https://youtu.be/24dF1Sz5rH8?si=5gYu9iKdtgr7S4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