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빠! 내가 핫팩을 낳았어!"

시트콤이 따로 있나!

by 뽀득여사
“순풍! 순풍! 순풍! 야!”

분홍 가운을 입은 순풍 산부인과 병원식구들이 우렁찬 수간호사의 구호에 맞춰 팔을 저으며 진료를 시작하는 그 순간!


나는 ‘헛둘헛둘’ 스텝퍼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요즘 늘 하던 저녁 루틴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리듬이 잘 타졌다. 땀이 살짝 맺히려던 찰나, 발밑에서 툭.
뭔가 작고 따뜻한 게 떨어졌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오빠, 나… 핫팩을 낳았어!”


옆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던 남편이 멈춰서 “뭐라고…?” 하며 어리둥절 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것 봐, 내가 핫팩을 ‘순풍~’ 낳았잖아!”


남편은 내 발아래에 떨어져 있는 작은 핫팩을 보더니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푸하핫!” 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갑자기 추워져서 속옷 안쪽에 핫팩을 붙였던 게 운동 중에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순풍산부인과’의 분만 장면처럼 타이밍 좋게 떨어져 나온 바람에 우리 둘은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깔깔깔!!

그날, TV 속 시트콤보다 우리 집이 훨씬 더 시트콤이었다.

시트콤이 따로 있나.
그러고 보니, 시트콤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삶이란, 가끔은 이렇게 ‘툭’ 하고 떨어지는 작은 사건 하나로 웃음을 찾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왜 시트콤을 좋아할까?


생각해 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시트콤을 좋아했다.
프렌즈, 섹스 앤 더 시티, 빅뱅이론, 남자 셋 여자 셋, 지붕 뚫고 하이킥…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수십 개의 시트콤을 섭렵했다.
이 나이가 되어도 짱구를 보며 웃는 걸 보면, 시트콤식 세계관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순풍산부인과>도 수십 년 전의 시트콤인데도 여전히 또다시 봐도 너무 재미있다.


반면, 실제 사건 기반의 재난영화·전쟁영화·무거운 드라마는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실제로 죽거나 다친 사람이 많았던 이야기라면 더더욱 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그 유명한 타이타닉도 아직 온전히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니 이건 일종의 ‘유난’ 일 수도 있다.
그만큼 나는 불안과 갈등에 취약하고, 마음의 ‘추위’에 민감한 사람이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런 장면들을 멀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감기에 잘 걸리는 사람이 찬바람에 예민한 것처럼.

그래서 나는 시트콤을 좋아한다.
어쩌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안전한 웃음’을 선택하는 건지도 모른다.

시트콤은 그런 점에서 내 삶을 지탱해 주는 작은 난로 같은 존재다.
언제든 켜두면 방 안 공기를 훈훈하게 하는 작은 불씨처럼.



복잡해지기 전에 다시 시트콤으로!


요즘 나의 퇴근 후 루틴은 이렇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은 운동매트로, 나는 스텝퍼로 향하며 넷플릭스로 <순풍산부인과>를 켠다.
‘빰빰 빰 빰 빰빠바밤 빰~~’ 순풍산부인과 오프팅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고 나는 발을 굴리며 ‘헛둘헛둘’, 남편은 ‘으챠으쌰’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그 시간 동안 마음이 말랑해지고, 몸에 붙어 있던 하루치의 긴장과 피로가 스르르 풀린다.

어떤 때는 소파에 기대 귤을 까먹으며,
어떤 때는 안마기 속에 몸을 쏙 집어넣고,
어떤 때는 스텝퍼 위에서 땀 한 방울 맺히며 본다.
그리고 그때마다
샘물 솟듯 ‘푸하하!’ 하고 웃는다.





인생은 시트콤이 아니다. 하지만… 또 시트콤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세상사는 게 시트콤 같은 날만 있는 건 아니다.

돌이켜 보면, 인생에는 무거운 순간도 많다.
가슴이 철렁해지는 날도 있고,
몸과 마음이 동시에 지치는 날도 있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마음에 맺힐 때도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시트콤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웃음을 주는 일들도 많다.
떨어진 핫팩 하나로 한참을 웃게 되고,
별것도 아닌 사건들이 삶을 조금 더 유연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나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내 인생의 연출자도, 극본가도, 주연 배우도 나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내 인생의 장르를 내가 고르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나의 인생 장르는 시트콤.
하하하. 걱정할 것 없다.
굴러도, 깨져도, 실패해도
결국 ‘별일 없더라’로 끝날 테니까.”




keyword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