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에서의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여행 막바지 며칠은 ‘그냥 놀고 쉬자!’라는데 만장일치로 합의했었다. 가족 모두 한국에서 나름 바쁘게 살아왔기에 작정하고 그냥 머리도 몸도 ‘쉬어 보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우리는 발레타의 꿈결 같은 시간을 뒤로하고 ‘놀면서 쉬기’ 위한 곳인 몰타의 세인트 줄리언스 지역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묵기로 한 드레고나라 리조트는 그야말로 ‘놀고 쉬기에 딱!’인 곳이었다. 발레타에서 우버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세인트 줄리언스로 들어선다. 지중해 바다를 끼고 발레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휴양지가 펼쳐진다. 일단 발레타는 전체적으로 황토색 빛이었다면, 세인트 줄리언스는 화려하다. 크고 작은 호텔과 리조트 그리고 휴양지 근처에 있을 법한 식당, 카페, 술집 등등이 호텔들 근처에 모여있었다.
나이 지긋한 친절한 우버택시 기사님의 설명으로는 ‘이곳은 밤에 오고 싶지 않다’며 ‘너무 시끄럽고 새벽까지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등을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발레타’가 역시 좋다고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처음에 몰타 공항에 도착해서 우버를 타고 발레타로 갈 때, 택시 기사님한테 똑같이 들었던 이야기였다.
아마, 조용하고 여유롭게 살아오는데 익숙한(발레타 지역의 느낌) 몰타의 토박이 시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인트 줄리언스 지역의 번잡함과 빠른 변화가 사뭇 부담이 되는 것 같았다.
나도 딱 그 기사님들 스타일이다 보니, 혹시 며칠 간의 ‘쉼’이 너무 시끄럽고 번잡스러우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리조트를 들어가자, 그 우려는 싹~ 날아갔다.
드레고나라 리조트에서의 전경
우리가 묵었던 리조트는 프라이빗 비치로 연결되는 형태로, 어찌 보면 전형적인 휴양지 나라로 다시 여행지를 바꾼 기분이 들었다. 지중해 바다로 바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의 리조트 내의 수영장과 썬배드, 맛있는 음식들…. 그리고 다행히 넓고 쾌적해서인지 여유로운 분위기가 좋았다.
수영을 너무 좋아하는 딸과 신랑은 수영장과 바다에서 하루종일 수영할 수 있다는 것에 이미 들떠 있었고, 리조트에 들어가자마자 트렁크에서 수영복부터 꺼내며 신나 했다. 반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으면 물속에서 패닉이 오는 수영 젬병인 나는 일단 발이 충분히 닿는 썬배드 주변의 작은 수영장이면 충분하다고 스캔을 끝냈다. 나는 파라솔 그늘 아래 썬배드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하는 로망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로 책과 노트북을 먼저 트렁크에서 꺼냈다.
드레고나라 리조트는 각자의 취향대로 즐기고 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썬배드에서 커피마시며 글쓰기
몰타로 오는 공항에서도 동양인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리조트 내에서도 동양인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조식 때 레스토랑 프런트에서 ‘미스터 김 패밀리’라며 인사를 건네주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며칠간의 ‘먹고 쉬고 놀자’의 목표를 확실히 누릴 수 있었다.
“당신들 한국사람?”
“당신들 착한 사람들”
“내 동생 똑똑해”
“내 동생 외국 처음”
“나보다 열여섯 어려”
“나 동생 걱정 돼”
“내 동생 부탁해도 될까?”
리조트 내의 서빙 직원들은 거의 현지인이 아닌 듯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빙 직원들은 네팔, 필리핀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중해 바다는 너무 예뻤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태양은 뜨거웠기에, 수영하고 먹고 쉬는 우리로서는 최고였다. 그런데 식당에서 수영장으로, 파라솔로, 바다로 음식 쟁반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분주히 움직여야 하는 서빙 직원들은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나와 딸 그리고 남편은 서빙 직원들이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진심으로 미소를 보이며 친절하게 감사를 표했다.
첫날, 유독 하얀 이를 활짝 보이며 친근하게 웃는 직원이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왔다. 리조트 내에 동양인이 드물다 보니,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는 ‘한국’이라고 했더니 그는 “안녕하세요” “좋아요”등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말을 하며 약간 쑥스러운 듯 웃었다. 우리는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더욱 활짝 웃으며 ‘한국말 잘한다’며 칭찬해 주었다. 그 직원은 자신은 네팔에서 왔다며 몰타에 온 지 6년이 넘었다고 했다. 다른 파라솔로 음식을 서빙하면서도 그 직원은 우리에게 눈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참 친절한 직원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리조트 이틀째, 아침부터 태양은 빛났고 지중해 바다는 햇살에 샤르르 빛을 내며 잔잔히 일렁거렸고 파란 수영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아침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우리 가족도 일찌감치 파라솔에 자리를 잡고, 나는 발이 충분히 닿는 수영장으로 딸과 신랑은 지중해 바다로 물놀이를 하다가 파라솔로 돌아왔다. 파라솔에서 쉬고 있는데, 어제의 그 직원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우리도 반갑게 인사했다. 그런데 그는 쉽게 자리를 뜨지 않고 머뭇거렸다. 뭔가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의 이야기
그는 35살의 네팔 사람이다. 일곱 형제 중 장남이었다. 막내는 19살. 그는 그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막내 동생과는 열여섯 살 차이가 난다. 막내 동생은 똑똑하다. 그가 업어 키웠다고 한다. 똑똑한 막내는 그의 자랑이자 자부심. 그 귀한 막내가 한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한다. 동생이 외국에 나가는 것이 처음이라 그는 걱정이다. 아버지 같은 큰형은 똑똑한 막내의 공부 뒷바라지를 해 왔으며 앞으로도 할 생각이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동생들을 보살피고 집안을 건사했다. 그는 똑똑한 막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고, 또 집안의 자랑이 될 것임을 믿고 있다. 막내는 곧 한국으로 간다.
그.래.서.
그는 한국 사람들, 그의 눈에 친절하고 단란해 보이는 한국인 가족이 반가웠던 것이다.
“당신들 한국사람?”….. “당신들 착한 사람들”…. “내 동생 똑똑해”…. “내 동생 외국 처음”… “나보다 열여섯 어려”… “나 동생 걱정 돼”… “내 동생 부탁해도 될까?”…. (물론 한국말이 아닌, 영어로)
네팔의 그 형은 우리에게 친절하지만 간절하게 용기를 낸 듯한 말투로 이런 말들을 건네왔다. 그는 우리가 친절하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부탁한다고 했다. 동생과 서로 메일주소를 주고받아서 혹시, 동생이 한국에서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해도 되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너무 고마워하며 바로 그 자리에서 동생과 화상통화를 했다. 동생은 형의 말대로 착하고 순수해 보였다. 형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조금 당황한 듯하기도 했다. 동생은 부산의 한 대학으로 유학을 오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지역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같은 한국에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에 형은 안심이 되나 보다.
형은 우리에게 동생의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고, 우리 메일 주소도 알려주었다. 형은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몰타에서 만난 착한 네팔 형!
가족을 위해 먼 타지에서 청춘을 내어 놓고 일하는 큰 형!
많은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큰 형!
막냇동생을 아들처럼 업어 키운 큰 형!
착하고 똑똑한 동생이 한없이 자랑스러운 큰 형!
구슬땀방울을 흘리면서도 그 동생을 생각하면 웃음이 배시시 나는 큰 형!
가족을 위해서라면 거절당할 각오도 마다하지 않고 용기 낼 수 있는 큰 형!
한국의 지난 시절에 그런 큰 형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한국의 그런 큰 형들은 독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베트남으로 또 어디든….. 자신들보다 더 무거운, 가족이라는 큰 짐을 양 어깨로 짊어지고 세계 곳곳으로 나갔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업어 키워진 막냇동생들은 그 형들의 눈물과 땀으로 공부하고 결혼하고 성장하고 일가를 이루고….. 그렇게 한국의 수많은 큰형들과 막내들이 있지 않았을까!
일상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그 며칠만은 ‘쉬고 먹고 놀자’고 작정하고 간 그곳에서 나는 가족이라는 큰 짐을 기꺼이 지고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흰 치아가 다 보이도록 웃고 있는 착한 네팔 형을 만났다.
리조트에서의 이틀째 밤이 되었다. 몰타의 맑은 밤하늘에는 깨끗하고 순수한 네팔의 착한 형의 눈빛과 닮은 순수한 별이 착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