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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유 Aug 15. 2024

소원을 말해봐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지난 주말, 오랜만에 자유부부의 시간을 얻어 남편과 둘이서 근처 바닷가로 1박 2일 여행을 했다.

사실 여행이랄 것도 없는 게, 우리는 워낙에 애주가 부부라 - 여행이란 그저 새롭고 아름다운 배경에서 새로운 안주와 술을 한잔 하는 것 정도가 되겠다. (해외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둘이서만 함께 할 수 있을 기회가 생길 때 제일 고려하는 것은 '아이가 먹지 못하는 음식 중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안주 삼아 술을 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인데 이번 여행에서 선택된 안주는 바로 '해녀가 앞 바다에서 바로 잡아주는 신선한 해산물'.(말만 들어도 소주가 땡기는 기분이다.)

덥고 더운 날씨였지만 낭만을 벗삼아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다 앞 포장마차에서 갓잡아 신선하다 못해 꿈틀꿈틀거리는 해산물들과 함께 소주를 한잔했다. 방학 내내 붙어 있었던 아들내미와 잠시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기쁨(함께 있을 때도 행복하다. 진짜다.), 약간은 쿰쿰하면서 짭짤한 냄새, 탁 트인 바다의 풍경, 거기다 살얼음이 송송 낀 소주 한잔. 캬,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해가 쨍쨍할 때 이미 낮술을 알딸딸하게 한잔 하고는, 둘이서 뭘 한번 해볼까 고민하다 더위를 유난히 힘들어하는 아들과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땡볕에 걷기'를 선택하고 근처의 해동 용궁사로 향했다.

해동 용궁사. 양양의 낙산사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과 바다를 끼고 고즈넉하게 서 있는 절을 보면 (종교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괜히 마음이 잔잔해지고 경건해지는 느낌이 든다. 덥다고 헥헥거리며 언제까지 걸어야 하냐며 불만을 토로하는 아들도 없고, 시간에 쫓길 일도 없고, 둘이서 한번 이곳에서 여유있게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다.


집에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곳도 아닌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근 10년 만에 다시 찾은 용궁사에는 이전과 달리 부산을 여행하는 외국인들로 가득했다.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바다, 불상, 사찰을 카메라에 담으며 신기해 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설레는 기분이 든다.


목표한 것 없이 천천히 걷다보니 이전과 다르게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 눈에 차곡차곡 담으며 걸어본다. 그 중에서도 유독 내 걸음을 붙잡은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염원을 담은 연등과 금빛으로 빛나는 소원 나뭇잎 종이.

불교를 믿는 사람이든 그저 나처럼 여행객으로 구경을 온 사람이든, 모두 각자의 간절한 소원을 담아 짧은 문장에 꾹꾹 눌러 담아 놓은 것을 보니 괜히 마음이 찡해진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 나이가 조금씩 들어 갈수록 그저 인생살이가 마냥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 귀여웠던 어린 아이의 소원.

나까지 설레게 했던 '미극'에서 온 사리나의 소원. 이 여행이 끝날 때 쯤엔 사리나와 앤디의 사랑이 이루어졌을까? 얼굴도 모르는 만리타국의 청춘들이지만 사리나의 간절한 마음이 앤디에게 닿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닿았던 부모님의 소원.

공부하느라 고생 중인 예쁜 딸이 얼마나 눈에 밟혔을까. 캄캄한 동굴같던, 임용을 준비하던 때에 우리 부모님도, 나를 위해 팔공산 꼭대기에서 주말마다 108배를 드렸다. 그 해에 보란듯이 합격하여 부모님께 뿌듯함을 안겨드렸지만 나는 안다. 팔공산 부처님이 부모님의 정성에 자비를 내리신 게 아니라는 것을. 주말마다 그 힘든 일정을 소화하는 엄마아빠가 마음에 걸려 매 순간 죽도록 노력했던 내가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의 예쁜 딸 정아름도 올해는 꼭 좋은 일이 있기를.


나이를 들며 눈물이 많아지는 것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청춘으로, 철없는 자식으로, 친구로만 살아가다 이제는 부모로, 또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어느 정도는) 철든 자식이 되었다. 나의 범주가 넓어질수록, 이해할 수 있는 소원의 범위도 넓어졌다.


남편과 함께 자유부부라며 - 별 생각 없이 향했던 해동 용궁사에서, 흘러가는 인생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살아가면 갈수록 '나'의 소원에서, '내 가족'의 소원으로 바뀌어가는 우리들의 바람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뿐만 아닌 - 금빛 소원 나뭇잎 속의 모두의 간절함이 조금씩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카페로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상념에 젖어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다음 주 글감 생겼다 하고 좋아하고 있는거 아니야?ㅋㅋㅋ제목은 '소원을 말해봐♪'”

하 킹받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그대로 제목을 정해본다.

남편과 나의 담백하고 유머러스하며 - 끈끈한 이 사이도 영원하길 금빛 소원지 속에 슬쩍 끼워놓아 본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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