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길은 막히고, 마음은 열리고

비와 국물, 그리고 하루

by 허정호

비와 국물, 그리고 하루

며칠째 이어진 집중호우가 산청까지 삼켜버렸다.

휴대폰에는 정전 안내 문자가 도착했고, 순간 냉장고가 떠올랐다. 차단기라도 내려가면 안의 것들이 모두 상할 게 뻔했다. 비가 그친 다음 날, 아내와 함께 시골집으로 향했다.

믿었던 3번 국도마저 산사태로 막혀 있었다. 다른 길도 모두 끊겨, 우리는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비빔밥집. 계절 메뉴라며 내놓은 육개장을 포장해 왔다. 다음 날 점심, 뚜껑을 여는 순간 매운 냄새가 확 퍼졌다. 고춧가루도 넣지 않았는데, 후추 향이 강했다. 아내는 건더기를 씻어 먹으려 했지만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았고, 나도 몇 숟가락 버티다 포기했다. 허기를 채우지 못한 점심은 그렇게 지나갔다.

도로가 일부 뚫렸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길을 나섰다. 문대 마을에는 다리가 끊겨 있었고, 집 앞에는 젖은 가재도구가 널려 있었다. 산사태로 흙과 나무가 뒤엉킨 길을 지나 시골집에 닿았다. 다행히 집은 고요하게 잘 버티고 있었다. 예전에 넓혀놓은 개울과 둑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냉장고는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정전으로 녹아내린 냉동식품들. 바닥은 흥건했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내가 건네주는 상한 음식들을 마당에 묻으며, 이번 비를 기억 속에 함께 묻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트럭이 빠져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거창 쪽으로 돌아 나와야 했다. 긴 하루였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국물이 있는 게 먹고 싶어.”

추어탕집은 이미 지나쳤고, 붕어곰탕집은 휴일. 결국 진주에 다다라 돼지국밥집에 들렀다. 아내는 포장을 부탁하며 “국은 끓이지 말고 식힌 상태로 주세요”라고 했지만, 밀봉된 팩은 뜨끈뜨끈했다. 집에 돌아와 국을 다시 데우고 순대와 고기를 넣으니, 따뜻한 저녁 한 끼가 뚝딱 차려졌다.

국밥보다 더 따뜻했던 건, 집까지 가져가 편히 먹자고 제안해 준 아내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또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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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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