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딱따구리 Jul 16. 2024

Scene 3. 달의 삼중주

 long story short (상)- 단편소설


일요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셋째 주의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일요일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프리마켓 구경을 갔다. 오전에서 오후가 넘어갈 즈음 집을 나선다. 사에가 만들어준 울퉁불퉁한  팬케이크와 밀크티와 과일 정도를 나눠먹고 집을 나섰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하는 주말 이벤트였다.


사에는 그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는 손재주가 꽤 좋았기 때문에, 직접 만든 퀼트 인형 몇 가지를 가지고 나가서 팔기도 했다. 집을 나선 후, 이안이 집 문을 잠갔다. 우리의 집 문은 자물쇠로 열고 닫는 방식이다. 꽤 허술했지만 그 점이 재미있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도시 외곽의 낡고 낮은 아파트 중, 맨 꼭대기 층인 5층에 있었다. 15평가량이나 될까.. 물론 셋이 살기는 작았지만, 주방과 거실과 욕실이 딸린 그럴 듯 한 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공간을 무척 사랑했다. 셋이서 이곳을 보자마자, 곧 우리가 살 집이 될 줄을 예상했다. 역시나 모든 조건이 맞아 그곳에 살게 되었다. 처음엔 단 한 점의 가구조차도 없던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이미 이곳에 살고 있는 듯한 우리의 모습이 펼쳐졌다. 인생을 통틀어 무언가에 그토록 설레었던 적은 지금까지도 없다. 확신과 충족감이었다.


늘 셋이서 집을 나섰다. 그때에 귀 끝으로 스쳤던 바람이 지금도 떠오른다. 고국의 가을 같은 냄새가 났고, 마치 그것은 말을 하는 듯 살랑한 소리를 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바람 같은 것으로 그때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편인 듯 도 하다. 우리가 고국에서 가져온 옷들보다 이곳에서 산 옷들이 더 많아지게 되던 즈음이었다. 그곳의 날씨는 그야말로 지랄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떠나온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야 그다지 긴 시간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이전의 생활이라는 게 무척이나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만큼이나 우리는 이곳에 무척이나 동화되어 있었고 더 이상 고국에서 필요한 것이란 우리에게 전혀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적응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 명이서 만들어내는 창작적이고 정규적인 생활에 길들여져 버렸고, 이것은 우리를 나태하게도 만든 반면 긴장하게도 만들었다. 이런 상태는 늘 그런 법이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불안정을 찾는 존재인 것일까. 그 소규모로 핀 붉고도 흩뿌려진 듯한 작은 행복의 낙인들은 나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빠지게 하곤 했다. 완벽이 주는 불안이다. 불완전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은 이렇다 할 문제도 없었고 딱히 저렇다 할 이벤트도 없는, 그저 서양 명랑만화 속 주인공이 여름방학을 맞이해 한 번씩 놀러 가던 시골 친척집 이모 '메리'의 일상과도 같은 느낌의 전원생활 그 자체였다. 이상하리만치 뭔가가 고장 나는 일도 드물었고, 그렇다고 셋 중에서 누군가가 아픈 일도 드물었다. 고국에서 가져온 상비약은 무척이나 많이 남아 있었으며, (사에가 잔병 치례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곳에서 그다지 아파주지 않았다.) 이안이 먹던 항우울제도 생각보다 쉽게 떨어지지 않고 넉넉했다. 여기에서는 떨어지면 사면된다. 이곳은 고국보다 그러한 것들을 쉽게 판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이곳에 와서 거의 그 약물을 복용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발작이 오거나 증상이 심해질 때에는 간혹 먹기도 했지만 말이다. 뿌리는 뽑혀질 수가 없으니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떠나온 지  약 1달가량 되었을 때쯤 그는 그렇게 되었다. 우리 모두 그 점에 기뻐했다. 역시 우울의 기운은 살던 곳의 모든 것, 바로 그것이라 생각했다. 떠나온 일은 참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순수하게 그런 것들에 기뻐할 수 있었던 날들이다. 풍족하다고 할 수 도 없었지만, 돈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가 컴퓨터로 무엇인가를 하루에 몇 시간씩 해왔기도 하고, 가지고 온 돈도 꽤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돈의 출처는 알 수 없다. 나는 그 당시에 그냥 옷 몇 벌과 여권만 챙겨서 나온 거니까 어떻게 그곳에서의 생활이 되고 있던 것인지 몰랐다. 그의 어머니만큼은 어차피 우리가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주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그런 우리를 그저 그런 식으로 바라봐 주고 있었던 것이다. 기묘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를 믿었고, 우리를 믿었으며, 서로가 그러했기에 그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내가 살던 곳에서 완벽히 증발해 버렸고,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버리고 그곳에서 그런 식으로 그들과 살게 되었다. 매일이 일생에 한 번 꾸는 꿈결과 조우하는 것 같았다. 비현실이라는 깨고 싶지 않은 무대 같은 곳에 휙 하고 영원히 빠져버린 듯했다. 마치 이곳이 우리가 전생정도쯤에 태어난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망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충족스러웠고 자연스러웠다. 익숙함, 그 자체였다. 아니, 살아왔던 곳이 아닐까 한다.


그때에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만큼 그가 나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존재라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와 떨어져서 생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와 내가 함께 하는 것은 그저 당연한 흐름이었다. 서로에게 우리는 그저 당연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고 사에는 우리의 매개체 그 자체였다. 그녀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게 해 준 완벽함이다.


외국에서 1년 정도 살다 온다는 짧은 메시지는 남기고 왔지만(부모님의 침대 위에 손으로 쓴 편지를 남기고 나갔다.), 남은 자들에게 할 짓은 아니었다는 생각은 든다. 나는 전혀 그러한 삶을 산 이력이 없는 인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날개를 다친 주제에 날개가 아닌 다리를 절어왔고 앞이 보이지 않아 비행할 수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무척이나 모순적이며, 영악하고, 그러나 고분고분하고 유들유들한 존재. 그런 종류의 인간이 변형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더더욱 놀랄만하고 황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추측이다. 부모란 것이 돼 보면 그다지 또 놀라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우리는 셋째 주, 그 프리마켓이 열릴 때면 어김없이 외출했다. 프리마켓은 도심에서 열렸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집을 나서서 기차역으로 20분 가량을 걸어가야 했다. 거기서 도심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30분을 달려야만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해서도 버스를 타야 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가는데 1시간 남짓이기 때문에 괜찮다. 어차피 크게 할 일도 없었다. 그 자체가 우리의 일이었다. 셋 다 바닷가 마을에서의 단조롭고 한적한 생활을 사랑했지만, 어쨌거나 이것저것 도심에서 살 것들도 필요했고, 사에가 가끔은 시끌벅적하고 사람이 많은 곳을 구경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는 별로 즐기지 않았지만 그저 흘러가는 시간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우리가 길을 떠날 때에는 늘 사에가 작은 배낭 하나를 맸다. 그  배낭 안에 여유분의 작은 우산, 그리고 약간의 현금, 물병 하나 정도를 넣었다.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그 빛바랜 은색빛의 배낭을 안고 잠에 빠진 그녀의 얼굴이 아직도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하다.  나는 그때 그녀의 자는 얼굴을 무척 많이 봐 두었었다. 예쁘고 말끔하고 작은, 지는 태양을 머금은 노란 얼굴. 그것에 나는 쉽사리 평온해지곤 했다.


그녀는 그렇듯,

우리에게 완벽한 시공간의 초입이었다.



* 하 편으로 이어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