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에 Jul 02. 2024

Scene 1. 작약, 첫사랑의 첫 만남

Flower language- shyness  


나는 그를 애써 기억해 내려 애쓰진 않는다. 기억나면 어쩔 수 없는 것 정도로 밀어내본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고, 지워내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저 천진하게 바라보며 마음을 놓고 시간이 유희하는 대로 간직하고 싶다.


그를 그때의 그 상태로 두고 싶기 때문이다.

온전히 내가 사랑한 그로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한적하고 작은 도시에서 열린 한 신인작가의 개인전을 통해 처음 만났다. 그 신인작가란 나의 작은 이모이다. 학교 일과 중 마지막인 3시간짜리 전공수업을 마치고, 나는 곧장 학교버스를 타고 백화점이 있는 전철역에 내려서 그녀의 개인전을 축하하기 위한 작은 꽃다발을 샀다.



그 꽃은 옅은 분홍빛의 활짝 핀, 작약이었다.


백화점이라 생각했던 것만큼 비쌌지만, 꽃도 예뻤고 치장도 예뻤다. 나는 작약을 무척 좋아한다. 그렇듯 가끔이라도 꽃을 살 일이 있으면 늘 내가 좋아하는 꽃을 샀다. 장미, 수국, 작약.. 그것을 들고 누군가를 축하하기 위해 가는 동안의 행복감이 좋았던 것도 같다. 화려한 리본과 포장지, 레이스 등으로 화사하게 치장되었지만 결국에는 점점 옅어지고 사라질 한정적인 향취, 그리고 그 새침하고도 백치 같은 도도한 자태와 교감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기 때문이다. 총칭, 꺾어진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아무튼, 그날의 나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나는 이상하리만치 무척 들떴다. 여리하고 화사한 분홍색의 꽃향기를 맡으니 순간적으로 기분이 무척이나 취할 듯이 좋아져 실제로 나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왈츠를 추는 듯한 발걸음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차분해지려 애를 쓰기까지 했다. 입가에서 머문 간지럽고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자꾸 머리깨로 흘러나왔다. 마치, 스스로가 다섯 살짜리 아이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내친김에 나는 음료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밀크티도 샀다.


일시적 조증환자는 어깨에 토트백을 매고, 새로 산 감색의 얌전한 원피스를 입고, 또각거리는 낮은 하이힐을 신었다. 한 손에는 작약을 다른 한 손에는 차이티를 든 나는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마침내 그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아니, 나는 도착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가 멈추고 사람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자 나는 잠에서 깨어 멍해진 머리를 가볍게 털고, 작약꽃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봄바람이 가볍게 머리 사이로 흩어졌다. 아, 날씨 좋다. 딱 그렇게 생각이 들만한 날이었다. 또다시 기분이 흘러가 버릴 듯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조증인 인간들의 고충을 그 날 다 알아버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기분이 좋았다가는 화장실에 가서 몰래 마구 웃고 와야 될 판이었다.


나는 간지러운 마음을 살짝 털어내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서 작은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을 끝으로 이모의 딸이 전화를 받았다. 그 아이는 중학생이다. 어색한 말투로, 그 아이는 수화기를 두고 중간에서 이모의 말들을 전언해 주었다. 이모의 학교 후배 중 하나가 나를 데리러 와 준다고 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무척 판이 작은 매점에서 밀크캐러멜 한 통을 샀다. 정말 작은 터미널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로 작았냐 하면 정말이지 도시의 규모에 비해서도 턱없이 작아서 도무지 이곳에 매점 자체가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도시인데.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작고 낡은 터미널 의자에 앉아, 나는 작은 이모가 보내준다고 하던 바****의 까만색 차량을 기다렸다.



아마도, 그 사람은 감색 원피스를 입은 25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 하나를 데리러 오는 중일 것이다. 누가 날 데리러 오는 것일까. 마음에서 조바심이 났다. 그러고는 또 마음이 들뜨는데 이건 도무지 대책이 없었다. 나는 오늘의 내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쯤이었다. 난 모르는 사람과 가야 할 15분에서 20분 남짓한 대면식을 위해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이어폰으로 들었다. 그래도 기분은 들떴기 때문에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경에 이르렀다.


그 혹은 그녀가 오기로 한 시간이 5분 정도 넘어갔다. 그래서 나는 터미널 안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던 지령을 무시하고 터미널 밖으로 나와 그 혹은 그녀를 기다리고자 했다. 어차피 터미널은 무척 작기 때문에 그 혹은 그녀가 나를 발견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터미널 입구에서 그 혹은 그녀를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그냥 어떤 남자였다. 약간 까만 피부에, 뭔가 교수나 변호사 같은 느낌의 날카롭고도 여유로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까만색 스웻셔츠에 갈색 로퍼, 짙은 회색의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말했다. 그는 한참 어린 나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옅은 웃음과 함께 예의 그 노려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가 나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지유.. 씨?


그는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모가, 태워주신다고 해서.


나는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를 보고 적잖이 당황하고야 말았다. 살짝 말끝을 흐렸다. 그를 만나자마자 마음속의 웃음기가 싹 가라앉아버린 것이다. 주섬주섬 휴대폰에서 이어폰을 뽑아 백 안에 집어넣고 나서, 앞서 걷는 그를 따라갔다. 마치 그와도 같이 깨끗하게 정돈된 까만색 세단의 보조석에 조심히 앉았다.


그가 시동을 걸자, 기다렸다는 듯이 쇼팽의 피아노협주곡이 흘러져 나왔다. 나도 그와의 첫 대면이 어색했지만, 그는 더 심각해 보였다. 그는 애써 이 어린 여자에게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생각해 내는 눈치였다. 심지어는 나에게 오후 5시에 점심은 먹었냐고까지 물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무언지 모르게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쇼팽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는 그냥 딱히 취향이 없다고 했다. 나는 내가 음악을 전공한다고 말했으며, 그는 나에게 무엇을 전공하냐고 물어봐주었다. 우리는 한참이나 바이올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공연이나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고, 나에게도 바이올린 연주회 같은 것 을 한 적이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곧 졸업연주회를 위해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나에게 정말 멋지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멋지다고 하는 말을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괜스레 내가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와의 대화는 정말이지 재미있었다. 그는 진중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온종일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나이답게 맑고 밝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잠시, 원래는 그렇지 않은 내 성격을 그가 알아차리면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곧, 미쳤나 봐 라는 생각도 했다. 미쳤나 봐,라는 생각을 하며 닫혀있던 차의 창문을 내렸다.


-아, 덥다. 시원하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더워요?라고 이상한 듯 물었다. 나는 사실 전혀 덥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네,라고 대답했다. 네, 마음이 너무 들떠서 열이 나요.라고 대답하고만 싶었다.


그와 대화를 마치고 갤러리의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동안에서야, 나는 나의 이 근원 없고 우발적인 조증이 그로 인해 기인된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하세요?


그가 황당한 표정, 그러나 여전히 쏘아보는 듯한 눈매의 얼굴을 하고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작가예요. 스튜디오 몇 개 하고 있고.. 지유씨 증명사진 같은 거 필요하면 찍어줄게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절대 빈 말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타입을 좋아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선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서 아,라고 말하더니 그제야 나의 의중을 반쯤 정도 의심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낡은 지갑 안을 뒤져 명함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 들고 일부러 그가 보는 데서 빤히 바라보다가 작은 지갑 안에 소중한 듯 넣었다.


-네. 안 그래도 프로필사진 필요한데, 작가님에게 찍으러 갈게요. 꼭이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다시 그를 보고 싶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주제에 안심을 했다. 우리는 그제야 차에서 내려 이모의 갤러리를 보러 갔다. 나는 흐드러지듯 핀 작약을 행복해 보이는 나의 혈연에게 건네고, 천천히 그녀의 작품을 감상했다. 그녀답게 천진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었다.


그도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녀의 그림을 감상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한마디의 말도 섞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씩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의 날카롭고도 시린 눈빛이 나의 궁금증과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쉬이 자극하는 듯했다.


그는 이내 신인작가에게 떠나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가족들과의 식사를 위해서 갤러리에 남아야 했다. 나는 이모와 함께 주차장까지 그를 배웅했다. 말끝마다 이모는 우리 착한 지유가 어쩌고 했다. 나는 마치 내가 열 살짜리 어린애가 된 것 같아서, 문득 그도 나를 그런 어린애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는 떠났다. 떠나면서 창을 반쯤 내리더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이모와 팔짱을 끼고 돌아오면서, 그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이모에게 같은 학과 출신에, 사진작가이고 몇 개의 스튜디오를 운영한다는 똑같은 말을 들었다.



열흘 후, 나는 사진을 찍기 전 날 그에게 전화를 해서 프로필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내일 시간이 도무지 안나는 눈치였지만 잠시만 스케줄 조율을 해 보겠다고 하고선 전화를 끊더니, 이내 다시 전화를 걸어와 오후 3시쯤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좋다고 말했다. 그러고서는 동기들과의 합주 연습 시간을 무리하게 변경했다.


나는 그를 만나러 가야만 했다. 뒷 날, 나는 나의 졸업연주회에 쓸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갔다.

그가 찍어준 내 사진은 나의 마음에 무척이나 들었다. 우리는 촬영을 마친 뒤 그의 스튜디오에서 커피도 마셨다.


보름쯤 뒤에, 그도 나의 졸업연주회에 와 주었다. 그는 큰 작약바구니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나는 조금은 당황했다. 그러나 무척 기뻤다. 그 모습을 보던 엄마가 다가와서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교수님이야,라고 대답했고 그는 머쓱한 듯 네,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교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넙죽 인사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날, 나는 그와 처음 데이트를 했고 그는 나를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적당한 가격에 음식이 맛있는 훌륭한 곳이었다. 우리는 완벽한 식사를 했다. 어김없이, 그와의 대화도 정말이지 즐거웠다. 그도 그런 듯이 보였다. 그는 와인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특별히 많이 마셔볼 기회는 없었지만 와인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그럴 수 있는 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와인마저도 특별한 취향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하우스 와인 몇 잔을 오랜 시간에 걸쳐 나눠마셨다.


식당을 나오면서 그는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손을 고쳐 잡으며 깍지를 꼈다. 처음 손을 맞잡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신이 나서 그와 맞잡은 손을 상하로 흔들었다.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유원지에 가던 어릴 적 그 마음과도 같았다. 그가 무표정하면서도 살짝 찡그린 바로 그 얼굴로, 조금은 불안한 듯 그러나 좋음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뭐 어때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게.. 어떤 게 아니라, 애 같아서.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말했다.

-뭐 어때요.


그는 웃었다. 우리는 정말이지 마음이 잘 맞았다. 그가 대리를 부르고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뒷좌석에서 우리는 맞잡은 손을 부드럽고 필사적으로 쥐고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해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가 또 창문을 반쯤 열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그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는 멀어져 갔다.



page 1. 우리의 시작에 관한 기억. 이별과 동시에 재회를 약속하는 듯한 창백한 자태의 작약과도 같이 왠지 모를 중압감과 수줍음으로 나의 장면에 한없이 물들어 있다.


-write a short story-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