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짓기
사람을 처음 만나는 순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느낀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러비안(Albert Mehrabian)은 의사소통에서 메시지가 전달되는 비율을, 시각적 요소인 표정과 몸짓이 55%, 목소리의 톤과 속도 같은 청각적 요소가 38%, 그리고 말의 내용은 고작 7%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언어적인 것보다 비언어적인 것들이 인상과 호감을 좌우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한 번 받은 나쁜 인상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좋은 인상을 예순 번 이상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첫인상이 얼마나 강한지, 그 말 한마디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글도 다르지 않다.
특히 수필은 더 그렇다.
수필에서 독자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제목이다.
제목은 글의 첫 얼굴이고, 첫 호흡이며, 첫인사다.
제목에서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그 뒤에 아무리 진솔한 문장이 기다리고 있어도 독자는 발걸음을 멈춘다.
한 번 형성된 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제목은 수필 전체의 첫인상이다.
수필의 제목은 글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제재를 품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글이 끝내 말하고 싶은 단 하나의 마음이다. 제목이 흔들리면 글의 중심도 함께 흔들린다.
긴 설명보다 오히려 짧고 단단한 제목이 독자의 호기심을 건드린다. 좋은 제목은 독자를 불러들이는 동시에, '이 글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처럼 글쓴이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제목에 글의 내용을 모두 드러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읽고 싶어진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일까,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까. 궁금증을 남기는 제목, 그것이 잘 지은 제목이다.
수필은 정보 전달의 글이 아니다.
수필은 사상과 감정을 글로 옮긴 예술의 한 장르다. 그래서 수필에는 정답이 없다. 대신 진실이 있어야 한다. 멋있어 보이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생각과 감정이어야 한다.
수필을 쓰다 보면 이상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내 앞에 불쑥 나타나는 순간이다. 그때의 선택과 상처, 후회가 지금의 나와 마주 앉는다. 수필은 그 둘이 다투는 글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글이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글.
그래서 수필은 늘 현재형이다.
과거를 쓰고 있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상상으로 출발하지 않는다.
체험에서 출발하는 문학이다. 아주 사소한 체험이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 경험이 내 마음에 남긴 흔적이다. 길에서 넘어졌던 순간, 무심코 들은 한마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수필의 씨앗이 된다.
그리고 수필은 진실의 문학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은 사실을 나열하는 일이 아니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태도, 스스로를 미화하지 않는 용기, 불편한 마음을 슬쩍 피하지 않는 정직함이다. 독자는 문장을 통해 글쓴이의 진실함을 알아본다. 그 진실이 느껴질 때, 글은 비로소 사람의 마음에 닿는다.
수필의 목적은 설득이 아니라 공감이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쓰이지도 않고, 정답을 제시하려 하지도 않는다. “나도 그랬다”라는 마음이 독자의 가슴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것, 그 한 번의 공명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는 자신이다. 수필을 쓰는 시간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자, 상처를 정리하는 시간이며,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시간이다. 그래서 수필은 자연스럽게 치유의 글쓰기가 된다.
소재는 많아도 된다.
하지만 중심은 하나여야 한다. 중심이 있는 글만이 오래 남는다. 무엇을 썼는가 보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중심이 분명한 글은 문장이 흔들려도 다시 돌아올 자리가 있다. 제목은 그 중심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약속이다.
수필은 결국 사람을 만나는 글이다.
독자와 만나고, 과거의 나와 만나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와 만나는 글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듯, 한 편의 수필도 처음부터 마음을 건네야 한다. 그 진심이 느껴질 때, 독자는 조용히 글 속에 머문다.
그리고 그 머무름이,
우리가 수필을 쓰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