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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안 금단의 선

-헤어지고 나서도 버리지 못한 습성들

by 소진

아내의 짐이 빠져나갔지만, 장롱 안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전쟁통에 급하게 사람들이 떠난 흉가처럼.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를 ‘물 먹는 하마’의 울어버린 껍데기가, 그곳에서 흘러나온 제습제의 얼룩들이, 습기를 닦아내려 급하게 받쳐둔 해진 티셔츠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서로 다른 색과 모양의 빈 옷걸이들이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고목 같았다. 장 벽면에 붙어 있는 긴 머리카락 몇 가닥만이 떠난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가늠케 할 뿐이다.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은 지 11개월째.

장롱 안에선 냉기가 흐르고 있다.


걸려있는 옷은 출근할 때마다 교복처럼 입는 네이비색 양복 두 벌과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퇴근 후 걸치는 언더아머 바람막이가 거의 전부다.

팬티 양말 기본적인 티셔츠들은 건조기에서 나온 채로 구석진 곳에 처박혀 있다. 곱게 접혀 정리되지 못한 모양새가 ‘너희는 그런 취급을 받아도 돼’라고 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다.


결혼생활을 시작하며 소진 부부는 성에 차는 가구들을 구매할 수 없었다. 무리에 무리를 더해 강남의 소형 아파트를 월세로 구했지만, 무엇을 사든지 공간과 타협해야 했다.


신혼부부의 옷장은 대게 10자(약 3m) 남짓 되는 편이다. 가구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사이즈도 10자 모델들이다. 하지만 소진 부부는 6자(약 1.8m)에 만족해야 했다.


보관 장소가 충분치 않다 보니 아내는 꽤 많은 옷을 친정집에 보관해야 했다. 철마다 지난 옷들을 박스에 담아 친정으로 나르고, 또 새 옷을 공수하는 식이다.


환절기 때마다 옷가지와 엉켜있던 박스 안 제습제 냄새가 집안에 진동했다. 소진의 알레르기를 돋우는 가장 큰 요인은 꽃가루가 아닌 집먼지진드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4계절이 있는 나라라는 게 싫어. 동남아면 일 년 내내 같은 옷을 입어도 되는데…”


아내는 차분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때마다 소진은 무거운 망치가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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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줄일 만큼 줄였지만, 장롱 안은 언제나 붐볐다. 겨울이 되면 부피가 큰 외투들로 장롱문이 잘 닫히지 않았다.

그러기에 소진은 자기 옷이 전체 서랍장의 40%를 넘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엄숙한 의미로 자리 잡은 북방한계선(NLL)처럼. 소진 부부의 장롱 안에는 금단의 선이 존재했다.


그 선을 넘어가지 않는 게 아내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기 위해 찾은 방법이었다. 장롱 안 옷의 부피를 수시로 조절해야 NLL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부부생활의 에티튜드는 구체적인 협정이나 운영지침 없이도 지켜지는 꽤 높은 수준의 도덕률이었다.

“북한이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 선을 왜 이렇게 열심히 지켰던 거지?”


휑한 장롱을 바라보던 소진은 헛웃음을 켰다. 아내의 짐이 빠져나갔지만, 소진은 여전히 장롱 속 금단의 선을 계속 지키고 있다. 결코, 아내의 짐이 자리하던 서랍장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9년 결혼생활의 하비투스(Habitus, 라틴어로 습관을 의미)가 아직 몸에 배어있었다.

‘아침엔 우유 한잔과 사과 한 알.’ 뭐 이런 루틴이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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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은 생각보다 삶의 많은 부분을 송두리째 흔들었지만, 이런 일상적인 삶의 태도까지 바꿔내지는 못했다.

이혼했다고 유난 떨기보다는 살던 대로 사는 게 편안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관성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바뀌지 않는 하비투스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가장 비싸고 중요한 물건을 양말 더비 안에 두는 루틴이 대표적일 것이다.


결혼반지, 예물시계, 명품벨트…. 소진은 소위 예물이라 불리는 것들을 이런 터무니없는 장소에 넣어뒀다.


도둑이 들었을 때 가장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장소라는 이유에서다. 예물이 들어있을 것 같은 화장대나 금고가 아닌, 버려진 창고에 비싼 보물을 숨겨두는 셈이다.

물론 소진은 이 같은 습성을 같이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수년째 당당하게 따르기를 강요했지만, 집 밖 사람들에게는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사안이라 여겼다.


스스로 매우 기발한 역발상이라 자위했지만, 타인에게는 ‘연예인의 청소벽’과 같은 안주거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아내는 소진의 습성 자체도 그러했지만, 타인에겐 알릴 수조차 없는 것을 본인에게 강요한다는 사실에 더 ‘어이없어’ 했다.


“그런다고 도둑이 못 찾을 거 같아? 결혼반지를 그렇게 쓰레기 같은 곳에 보관하고 싶어?” 아내의 입에선 결코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욱이 소진 부부의 예물들은 도둑이 탐할 정도로 값이 나가는 것들이 아니다. 까르띠에, 불가리, 반클리프 아펠 등 금고에 꽁꽁 싸둘 법한 예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소진이 결혼하며 반지와 함께 받은 유일한 예물인 태그호이어 은시계도 시계 덕후들 사이에선 리스트에 오르기 힘든 저가 모델이다.


“잘 끼지도 않는 예물 그냥 서랍에라도 같이 두자. 얘네들도 본인들이 쓰레기 취급받는다고 생각하면 쓸쓸할 거 같아.” 아내는 제법 격식을 갖춰 호소했다.


하지만 소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수정하지 않는 그 뻣뻣함은 그들의 결혼생활을 점차 위태롭게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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