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이 갈라놓은 인연
“틴에이저(Teenager) 같이 왜 그래?”
소진은 아내를 향해 종종 이렇게 쏘아붙였다.
‘전인적 인간’이라고 여기는 아내를 화나게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말이었다.
아내는 여러 분야에 해박했을 뿐 아니라 지적 감성적 도덕적 신체적으로 균형감을 지닌 사람이었다. 웬만한 자극이나 말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쉽게 실망하는 법도 없었다.
어린 시절 “이번 주 아빠랑 놀이동산 가자”는 약속이 수차례 깨지면서 사람의 약속에 대해 그리 신뢰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이런 무게감과 담담함은 20대 중후반의 사회 초년병에겐 적지 않은 안정감으로 다가왔다.
연예 초 아내의 친구들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아요?”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과 단단함이 좋다”고 했으니까.
다만 어느 순간부터 ‘사춘기 소녀 같다’는 힐난에는 유독 민감했다.
복숭아 가루 0.1그램으로 아낙플락시스 쇼크에 이르게 하는 급성 알레르기처럼…. ‘틴에이저’라는 단어는 그녀의 교감 신경을 극도로 자극했다.
안하무인 민원인들을 상대하며 생긴 맷집도 이 말 앞에선 모래알처럼 무너져 버렸다.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성숙한 삶을 산 그녀에게는 참기 힘든 모욕감이었나 보다.
가볍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내가 그따위 말을 들을 정도로 그렇게 살지 않았다”라며 열을 냈다.
오늘도 아내의 입술 주변과 이마 부근엔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도발은 일단 성공한 듯하다.
‘속 좀 더 끓여봐라. 그러니 날 건드리지 말지.’
사춘기 소년이 담임 선생님에 반항하듯 소진은 도발 성공에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전면전까지 원한 건 아니었다.
소진은 잠시 거실로 나가는 행위로 휴전 선언을 했다.
그때마다 2인용 소파에 여름용 마 이불을 깔고 총각 시절부터 애용했던 돗자리를 얹었다. 선풍기 전원을 켜면 발밑에 계곡물이 흐르는 듯했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칼로리가 상대적으로 적은 카스라이트 한 캔을 따고 아내가 만들어둔 레몬청을 몰래 투여한다.
적에게 취득한 노획물의 달콤함을 맛보는 쾌감이 나쁘지 않았다.
다툼 후 1~2주의 침묵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서로를 어지럽게 했던 상념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염증의 근원까진 치유되진 않았을 테지만. 아주 작은 흔들림에도 쉽게 먼지를 일으키고 이내 서로를 다시 힘들게 했다.
방아쇠는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 당겨졌다.
정부의 11번째 부동산 정책 발표가 있던 날.
정부는 지난 규제 정책의 성과를 강조하면서 또 한 번의 대출 규제로 부동산값 상승을 반전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브리퍼로 나선 국토교통부 장관은 “7·10 부동산 대책 이후 시장 흐름에 약간의 변화가 보이고 있다. 부동산 상승세가 서울은 0.01%가 된 것이 4∼5주 됐고, 강남 4구는 0.00%”이라고 강조했다.
단기 상승세가 둔화된 부분을 강조한 것이다. 정부 출범 후 2년 동안 서울 아파트값이 20% 가까이 이미 오른 것에는 눈을 감은 전형적인 침소봉대였다.
물론 언론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소진이 느낀 불쾌함은 기사를 쓰는 사람들의 상식과 비슷했다.
단기적 흐름을 정책 성과로 포장했다는 비판적 시각의 기사들이 잇따랐다.
최근 2년 동안 정부가 대책을 발표할 때마다 부동산값이 0.5%포인트에서 1%포인트 가까이 올랐다는 박스 기사가 뒤이어 생산됐다.
실제로 아파트 매매 계약을 구두로 체결해도 자고 나면 “1000만 원 더 올릴게요”라는 문자를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정부의 단언과는 정반대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사람들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더 늦으면 안 되겠어. 우리 강동구라도 사자. 나는 미사신도시에서도 살 수 있어.”
소진은 이번에야말로 강남 월세에서 탈출하자고 주장했다. 보증금이 저렴했지만, 월 180만 원에 이르는 월세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올해가 지나면 또 월세가 오를 것이 불 보듯 뻔해 보였다.
반면 평생을 강남에서만 살아온 아내는 ‘월세라도 강남에 살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친정, 친구, 직장 등 모든 관계가 밀집된 강남을 떠나기 싫었다. 집값이 오르면 월세를 더 내고, 빌라로 가는 한이 있어도 강남에 살아야 한다는 뜻을 고수했다.
특히 자녀는 무조건 강남에서 키워야 한다 믿었다.
“집 사는 게 뭐가 중요해. 일단 우리가 여기 살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내가 강남 떠난다고 하면 친구들이 우리 집 망한 줄 알걸.”
아내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아무리 복잡한 의사결정 앞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고 차분했던 아내는 집 문제 앞에서만은 다른 사람이 됐다.
적어도 소진의 시각에서는 그랬다.
‘평생 평양에서만 살아온 북한 고위층은 평양을 떠나면 죽는다고 생각한다던데…. 너 지금 북한 고위간부처럼 위선적으로 보여.’
소진은 이 말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번만큼은 아내의 판단 근거가 합리적이지 않다고 확신했다.
지인을 통해 부동산전문대학원 출신인 부동산 컨설팅 전문가 스티브 리 박사를 소개받았다.
그는 소진의 재무상황을 고려해 강동구 명일동과 송파구 방이동의 구축 아파트를 추천했다. 5억 원 이상의 주택담보대출이 필요한 계획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집을 사기 어려울 것”이라는 스티브 박사의 진단은 평소 소진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했다.
“저한테 추천받고 일이 년 뭉개다가 집 살 타이밍 놓친 사람 여럿 봤습니다. 너무 똑똑하면 집 못 사요. 결심했을 때 결행하는 게 좋아요.”
소진은 어릴 적부터 지하철 노점상의 ‘절대 늘어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절대로 믿지 않았다. 의심 많고 귀가 얇지 않아 자기 판단이 서야지만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스티브 리 박사의 말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오른다는 기사가 넘쳐났다.
소진은 명일동과 방이동 일대를 샅샅이 뒤져, 매수 가능한 매물을 리스트업 했다. 강동구 고덕동 학원가에서 다소 남쪽으로 떨어진 소규모 단지 아파트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5억 원의 대출을 받아 7억 1000만 원에 매수 계획을 짜고 계약 약속을 잡았다.
일주일 전 같은 평수가 7억 원에 거래됐는데, 단 일주일 만에 1000만 원이 오른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가계약금 100만 원을 선입금하고 본계약을 체결할 약속을 집주인과 잡았다.
이제 사인만 하고, 계약금 10%만 보내면 끝이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흥분감이었다.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내는 계약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공동명의라 아내가 없으면 계약도 대출도 불가능했다. 아내는 아예 전화기를 꺼버리고 잠수를 탔다.
장모님, 장인어른뿐 아니라 아내의 절친들에게 모두 전화를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어제부터 좀 이상하긴 했는데….” 아내의 친구들은 알면서도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
‘미안해. 도저히 강동구에선 살 수 없을 거 같아. 돈 더 모아서 강남에서 좀 더 깨끗한 집으로 이사 가자.’
포장마차에서 소주 1병을 생맥주 한잔처럼 비운 소진에게 아내의 문자가 당도했다.
소진은 활화산처럼 화를 참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 참을 이유가 없었다.
“너 같은 허세녀와는 더는 못 산다. 이제 우린 끝이야 끝.”
소진의 급발진에 포장마차 옆자리 손님들이 수군 수군댔다. “싸움 난 거 아니지” 옆 포장마차 주인은 길가까지 나와 상황을 관망했다.
날려버린 가계약금보다 절망스러운 건 둘 사이의 간극이 더는 좁혀질 거 같지 않다는 지점이었다.
한 계단씩 성장하면서 단란한 둘을 만들겠다는 소진과 아내의 거리는 상당했다. 마치 한번 빠지면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는 히말라야의 크레바스처럼.
계약에 실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 소진은 처가에 머무는 아내를 찾아갔다.
아내와 장인을 향해 “죄송합니다. 이혼하겠습니다.” 두 마디를 던지고 집을 나왔다.
소진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법조인 출신 장인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한 번만 참아달라”, “우리 딸이 좀 부족하네” 등의 레퍼토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만류가 없다는 사실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장모님은 “강남에 살면 우리가 옆에서 도움도 주고, 자네도 편하고 다 좋을 텐데….”라며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놨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이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나눠야 할 재산이 있는 것도 양육권 분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진은 그렇게 결혼 9년 만에 다시 혼자가 됐다.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출산을 한 산모처럼 온 세포의 에너지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이사를 할 힘도 없었다. 회사와 180만 원짜리 월셋집을 오가며 시간이 주는 치유와 회복을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