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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 보다 코이누르

-명품 대신 동네 보석가게를 찾은 이유

by 소진

“나처럼 너도 많이 울었구나.”


이혼으로 인한 상실감이 멍함으로 치환되던 어느 휴일 아침.

소진은 습기를 머금고 심하게 울어버린 종이 반지 함을 옷장에서 발견했다.


분명 반성이 필요한 순간이었지만 소진은 매우 억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억울함의 대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막무가내로 그랬다.

무엇이라도 실패의 원인을 찾고 싶었고, 누구라도 탓하고 싶었다.


이 반지에 이혼의 책임을 묻고 나면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질 거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소용없는 말들과 생각들만 맴돌았다.

소진은 울어버린 반지 함을 열었다.

빛바랜 함과는 달리 금빛 결혼반지는 영롱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반지를 꺼내 네 번째 손가락으로 가져갔다. 신혼 때를 제외하면 제대로 끼지 않았던 반지였다.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도 아니고….’ 잠시 계면쩍은 기분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껴보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다.


그런데 웬걸. 반지가 끝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도 살이 쪘구나.’


70kg 후반 대였던 신혼 초 몸무게는 이미 80kg 중반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걸 잘 끼고 다녔으면 좀 더 건강하게 살고 있었겠지!’

‘지금 생각을 고쳐먹어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순 없구나’


부질없는 생각들이 다시 한번 밀려왔다.


9년을 장롱 속에서 징역살이하다 세상 빛을 본 금반지는 오늘따라 해에 반사된 강물의 윤슬처럼 반짝였다.

손가락.JPG


장모님은 결혼을 앞둔 딸이 내심 명품 반지를 끼길 바랐다.


꼬집어 말한 건 아니었지만, 중저가 예물 집을 검색하는 아내에게 “뭘 그렇게 검색을 해. 그냥 백화점 가지”라고 쏘아붙였다.


“사위도 이왕 하는 거 좋은 거 사면 우리도 마음 편하고 너도 좋은 거 받고 좋은 게 좋은 거지. 쪼잔하게…”


면전에서 이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장모는 응당 그럴만한 성정을 지닌 분이었다.


예물도 지참금도 받지 않겠다는 소진을 장모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반면 소진은 장롱에 처박힐 예물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돈이면 신혼여행 숙소와 비행기 좌석 업그레이드를 하는 편이 낫겠다고 확신했다.

예물은 적당한 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공장처럼 찍어내는 종로 3가 형 예물샵은 싫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디자인이 아니면서도 백화점에 버금가는 품위를 갖추길 바랐다. 소진은 가성비를 따지는 아내의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100원짜리 동전을 던져주면서 월드콘 하나랑 새우깡에 튀김 가락국수까지 사 와라’라는 불량배식 요구는 아니었는지.



아내는 현명했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 안에서 최적의 결론에 다다랐다.


‘우리 집안 보석가게’라는 따스하고 동화적인 디자인 모토를 내세운 예물 공방을 찾아냈다.


대형 다이아몬드를 의미하는 ‘코이누르’라는 공방은 이름의 화려함과는 달리 유니크하고 우아한 디자인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아기 엉덩이를 모티브로 한 돌 반지, 시할머니가 엄마에게 물려준 반지를 다시 딸이나 며느리에게 리폼해서 전달하는 스토리텔링 등 감성적인 접근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가고 있었다.


개념 연예인 몇몇에 의해 입소문을 타면서 기업형 공방이 주를 이루던 청담동의 주얼리 업계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명품.JPG



‘코이누르(Koh-i-Noor)’라는 이름도 소진 부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페르시아어로 빛의 산이라는 의미를 지닌 코이누르. 영국 왕실 소유인 105.6캐럿(21.12g) 짜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다이아몬드를 부르는 애칭이기도 하다.

다만 영국 왕실 소유가 되기 전까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불행의 씨앗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특히 남성이 소유하면 불행해진다는 이야기가 여럿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인도를 통치한 여러 권력자들이 코이누르를 소유한 뒤 단시간에 자리에서 낙마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힘이 없으면 가지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져 다툼과 전쟁을 불렀다.



소진은 코이누르를 찾던 첫날을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반지 이야기로 시작한 코이누르 송 대표와의 대화 주제는 예물 공방들의 박리다매식 영업, 해외 명품 시장의 거품, 국내 공방 장인들의 은퇴 등으로까지 이어졌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결혼 예물을 마트처럼 빨리빨리 후려쳐 파는 매장들이 너무 많다.”


송 대표의 절제된 자신감이 소진 부부는 마음에 들었다.


코이누르의 반지들은 같은 커브를 이루는 법이 없다.

비슷해 보여도 반지의 두께와 각도가 조금씩 다 다르다고 했다.


모든 반지를 직접 디자인하는 송 대표는 소진에게 하나의 링 안에 여러 개의 질감이 담겨있는 모델을 추천했다.

마치 방패가 반지 안에 새겨진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방패 문양의 반지가 액운을 막아주리라는 희망을 담았다고 했다.

소진의 아내에게는 악보에 새겨진 높은 음자리를 모티브로 만든 백금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 세트를 소개했다.

디자인의 퀄리티와 유니크함이 한 시간여의 대화의 농도와 화학적 결합을 이루면서 만족감을 배가시켰다.


“까르띠에는 집도 사고 조금 더 안정되면 꼭 사줄게.”

소진은 코이누르를 나오며 지킬 수 있을지 모를 약속을 했다.

아내는 “그런 거 없어도 괜찮아”라며 소진에게 기댔다.


20대 중반 두 번째 데이트에서도 둘은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대학로 한 커피숍에서 들국화의 ‘내가 찾는 아이’를 들으며 노랫말처럼 살자고 했다.


‘빈 주머니 걱정돼도, 사랑으로 채워주네~ 워~ 워~ 흔히 없지. 이이~ 예~ 예~’

팔을 잡은 아내의 손가락에서 소진은 그 어느 비바람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은 벽돌집의 단단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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