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옷 같은 결혼반지를 다시 낀 소진
새로 가공된 결혼반지는 맞춤옷처럼 잘 맞았다.
벨트를 하지 않아도 흘러내리지 않는 바지처럼 안정적으로 소진의 손가락을 감쌌다.
“너무 편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에서 빠져나갈 수 있어요. 편안하면서도 약간은 타이트한 느낌이 드는 게 좋아요.”
송 대표는 새 반지가 소진의 손가락에 주는 약간의 긴장감까지 세심하게 살폈다.
‘아마도 모든 관계가 다 그렇겠지.’
송 대표의 설명을 귀담아들으며 소진은 생각했다.
아무리 스스럼없이 편한 상대에게도 약간의 긴장감은 필요하다는 것을. 나약하고 형편없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줘도 된다고 생각하는 상대일수록 약간의 신비감이 남겨둬야 한다는 것을.
철학, 종교, 신념 등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런 의문이나 긴장감 없는 사상의 수용이 전체주의적 사고로 귀결됐잖아.
어린아이에게 검은색 염색약을 머리카락에 들이붓는 것처럼 하나의 생각을 흡수시키는 건 위험해.
그런 측면에서 나는 모태 신앙이 폭력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것들에도 1%의 여백, 아니 최소한 10%의 여백이 필요하다. 그 여백을 지워버리고 100%가 되는 순간 역으로 가장 순백이었던 마음은 망가지기 시작할지 모른다.
반지는 누가 봐도 결혼 예물처럼 보였다.
소진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다.
이혼남이 전 부인과 함께 맞췄던 구 예물을 끼고 있을 거라는 디테일한 상상력을 가동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혹여 있더라도 굳이 겉으로 꺼내서 부관참시하듯 “그거 예전 결혼반지 아니에요?”라고 물어볼 정도의 몰상식한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다.
혹여 묻는다 해도 “아닌데요”라고 말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도한 수사를 일삼는 검사처럼 이 반지가 이전 결혼반지인지 끝까지 캐묻는 사람은 지구상 몇 명이나 되겠어. 자격지심인지 모를 것이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친구 한 녀석은 아주 현실적인 명분을 들이대기도 했다.
반지가 새 인연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친구는 매우 답답하다는 듯 “너는 이제 여자 만나는 건 아예 포기한 거냐? 짝도 없으면서 짝 있는 척은 왜 하는 거야?”라고 일갈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반박할 논거를 대기 어려웠다.
“우리 나이대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데 유부남이 더 나을지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라며 센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도 어이가 없는지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전 애인에게 받은 명품을 이별 후 돌려줄 것인가’라는 온라인 가십성 게시글의 측면에서도 소진은 잠시 생각해 봤다.
엄밀히 따지면 전 부인이 준 선물인데, 돌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구질구질한 이혼을 경험한 여성들은 시어머니로부터 ‘반환 품목 리스트’를 받기도 했다는데….
마우스 스크롤을 굴리며 댓글을 살피던 소진의 손가락은 한 촌철살인 댓글에서 멈춰 섰다.
100만 원 이하=반납 안 해도 됨.
100~300만 원 이하=서로 주고받은 커플링 등은 반납품 아님. 명품백 등 일방으로 준 품목만 반납,
300만 원 초과=무조건 반납.
‘옆집 이혼남’님의 판정 기준에 따르면 이 반지는 맞교환한 것이니 반납 해당 물품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전 부인에게 준 결혼반지의 가격이 더 높으니, 소진으로선 손해 보는 장사다. 소진이 이 반지를 다시 가공해 착용한다 한들 법적 도의적 경제적으로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