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으면, 화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른다.
그래서 그 최악의 상황 속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행동으로 극복해 나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거기에서 깨달은 점을 궁극적으로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미움받지 않고 호감을 얻는 방법은?'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자, 시작해 보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을 깨달은 결정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때 당시 혼자 외톨이처럼 지내곤 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탁구 동아리 활동 때 앉아있는 나에게 가방을 던지거나 엎드려있는 나에게 배드민턴 라켓으로 머리를 툭툭 친다거나 점심시간에 엎드려 자고 있는 나에게 물총을 쏜다거나(이게 제일 화가 났다.) 등 나를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히고 시비를 걸곤 했다. 나는 그때까지 괴롭힘이라곤 당해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이런 일을 막상 당하니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수모를 겪고도 압박감에 반격다운 반격을 못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고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나를 괴롭힌 친구와 나는 어떠한 일면식도 없다는 것이었다.(실제론 기억을 못 하는 거겠지만)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괴롭힘이라는 것을 처음 당한 것이었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그 친구에게 물어봤다.
"왜 나를 괴롭히지? 너 나 알아? 내가 너한테 잘못했냐?"
그 친구의 대답.
"내 마음인데?"
허허...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 이유 따윈 없다. 일면식도 없는데 이유가 있는 게 더 이상하다. 나중에 이유를 들어보니 다른 동네에서 전학을 왔는데 나를 괴롭혀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괴롭힘으로 자신의 강함을 뽐내고 싶었다는 말인 것 같은데... 글쎄... 그게 되기는 하는 건가?
아무튼 나도 그 친구의 발언에 내 안에 있는 팽팽한 줄 같은 게 끊겨버렸다. 그래서 참다 참다 결국 때렸다. 마구 패주었다.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될 정도로 일방적으로 때렸다. 그동안의 설움이 터져 나온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글쎄? 난 저 말을 싫어한다. 때론 인간은 폭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어떠한 경우라고? 자신의 가족에 큰 해를 끼친 사람에게도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어.'라 할 것인가? 장담컨대 당신의 가족이 타인에게 폭력으로 인한 해를 입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본다면 당신은 침착하게 경찰에 신고하는 선택 같은 건 못할 것이다.(극단적인 예시이지만 요지는 이해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학교 내에서 큰 이벤트가 있은 이후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 친구를 때린 이후, 학교 내에서 나의 상황을 벗어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좋지 못한 상황에서 친구를 때려서 다치게 한 사람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먼저 나와 마찰이 있던 그 무리들에게서 나에게 사과를 했다. 한 명씩 나에게 찾아와서 그동안 미안했고 앞으로 다시 잘 지내보자라는 말을 건넸다. 어라? 이상했다. 그때 당시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가만히 있고 참고 견디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조차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런데 오히려 더욱 크게 적대적으로 나가고 화를 내니 그쪽에서 먼저 내게 말을 건네고 사과를 한 것이다.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안심의 눈물이었을까. 그동안 나 자신도 힘들긴 했나 보다. 설움에 복받쳐 눈물이 흘러버리고 만 것이다. 신기한 건 보통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후 눈물이 흐르는데 그때 눈물을 흘렸을 당시에는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눈물이 흐르고 나서야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는 의미이다. 아마 한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 또한 나로서는 보기 드문 경험이었고 스스로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그렇게 그 무리들과 화해를 하니 좀 더 재밌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무리가 아닌 다른 친구들도 내게 한 명씩 찾아와 사과를 하였다. 그동안 미안했단다. 나랑 일면식도 없는 친구가 나를 배척하고 기피하는 눈빛으로 나를 대하더니 내가 그 무리들과 화해하니 이제는 찾아와 미안하다며 멋쩍은 듯 애써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잠깐이라도 나와 교류가 있던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그런 일면식도 없는 친구들은 솔직히 '역겨웠다.'라고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미안할 자격조차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 사과를 받지 않고 따질 여유와 에너지는 그때의 나에겐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이벤트(?)가 끝나고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오니 이제는 모두가 나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교류가 없던 친구들의 적대적인 눈빛은 호의적인 눈빛으로 변하고 차가운 인상은 다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변했다. 내게 먼저 찾아와 말도 걸고 장난도 쳤다. 정말 이상했다. 난 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나를 싫어하다가 나를 좋아한다. 아, 물론 이런 것도 있다. 그들이 나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저 상황에 맞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간사함'이라는 요소 또한 포함됐다는 것을. 쉽게 말해 '가식'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 없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 눈빛, 행동, 분위기 같은 흐름에서 진짜로 나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말이다. 나와 교류가 없던, 나를 지켜보기만 한 친구들은 실제로 나를 싫어하기도 좋아하기도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판단할 때 혹은 나에 대해 단점만을 얘기할 때는 실제로 나를 싫어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판단이 될 때 혹은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들을 때는 실제로 나에게 호감을 느끼기도 한 것이란 것이다. 더욱 자세하게 얘기하면 자신이 믿는 친구가 나에 대해 나쁜 얘기를 하거나 나를 싫어하면 나를 싫어하고 자신이 믿는 친구가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하거나 나를 좋아하면 자기조차 좋아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분명히 느꼈다. 단순히 가식 같은 연기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한 무언가가 그들의 행동에서 느껴진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어떤 특정인의 기사나 인터넷에 글 따위를 보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거기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이야기 흐름에 동조하게 된다. 즉, 자신의 친구가 싫어하고 자신의 친구가 욕을 하면 자기도 싫어하고 욕을 하게 된다. 반면 자신의 친구가 좋아하고 좋은 얘기를 한다면 나도 모르게 그 말에 동의하며 자기도 좋아하고 자기도 좋은 얘기를 하게 된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뇌는 참 게으르다. 자신이 어떤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디테일하게 분석하기엔 우리의 뇌는 너무 게으른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떤 제품 같은 것을 인터넷에 보고 사려고 할 때, 사회적 증거인 '리뷰'를 보고 구매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귀찮은 '판단'을 누군가 대신 내려주길 바란다는 의미이다. 최고의 광고는 입소문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람은 자신이 믿는 사람의 판단을 따른다. 이 점을 기억하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꽤나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소위 '따돌림'을 당하니, 자신이 믿는 친구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니, 나를 안 좋은 사람으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판단'해버리고 만 것이다. 굳이 디테일한 진실을 누가 파헤치려고 하겠는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나 또한 그랬을 것이고 그런 것들이 어쩔 수 없는 현상임은 이해한다.
즉, 사람은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우리는 한 사람에게 진심이 담긴 사랑을 받고자 하면 된다. 우리가 만약 어떤 조직에 속한다고 한다면,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 한 사람에게 진심을 담아 호의를 베풀고 '잘 보인다면' 그 사람이 알아서 소문을 내줄 것이다.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음식점도 똑같지 않은가? 한 명을 진심으로 만족시키면 그 한 명의 손님이 다른 손님들을 데려와준다. 요즘은 인플루언서 마케팅이 유행인데 이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인플루언서가 특정 음식점을 홍보하고 여기가 맛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준다면 그 인플루언서의 팔로워들은 그의 말을 '신뢰'하고 그 음식점을 찾아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 음식점이 맛있다고 '판단'해주니 그 말을 '신뢰'하고 그 음식점까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며 찾아간다는 의미이다.
어떤 조직에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기보다는 단 한 사람에게 진심을 다해보자. 그렇게 한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그 조직의 나머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당신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당신을 위해 굳이 입소문을 내줄 것이다. 인간이란 동물은 '판단'과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판단하고 그 평가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람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그 인간의 본질을 통해 깨우쳤고 그 본질을 기반으로 어떻게 해야 우리가 속한 그 조직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지 알았다. 자, 그러면 이미 우리가 그 조직에서 '미움'을 받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미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해, 다른 사람들도 나를 싫어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지금 그 해결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쓰고자 한다.
내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를 괴롭힌 그 친구에게 화냄으로써, 때림으로써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는 이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꽤나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당해주는 것이 아닌 '화'라는 것을 내니 상황이 더욱 내게 좋아진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왔다.
그 이유는 당신의 미움받는 그 감정을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이 느끼는 그 슬픔, 화남을 그들은 당신만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이건 당신만큼 당신의 감정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을 미워하는 그들이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가여워서라도 미워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탈을 쓰고서는 미워하지 못한다.
근데 문제는 타인의 감정에 100% 공감하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공감능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장담컨대 공감능력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지능' 중 하나다. 공감하는 능력은 곧 지능이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행위를 하기가 어려워진다.(케바케이긴 하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행위를 자신이 타인에게 행할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어느 가게에 들어가려고 문을 열려고 한다고 해보자. 먼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 들어간다면 친구가 다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문을 잡아준다. 왜 그런 걸까? 배려를 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스스로의 뿌듯함이란 것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내가 문을 잡아주지 않고 그냥 안으로 들어간다면 상대방이 서운해할 것을, 상처받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에 그 '배려'라는 행위를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자신도 같은 상황에서 서운함을 느낄 것임을 알기 때문에, 공감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친구나 애인에게 식당에 앉으면 수저를 준비해 주는 것도, 물을 컵에 따라 건네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을 타당한 이유 없이 당신을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감 능력은 유전적인 것이든 환경적인 것이든 그 상황에서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타당한 이유 없이 당신을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당신을 향한 미움을 걷어낼 수 있는 것일까?
바로 말을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화를 내는 것이다. '왜 나를 미워하냐.', '그런 이유로 나를 미워하는 것은 잘못된 거다.'라며 눈을 보고 똑바로 화를 내줘야 한다. 당신이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의사를 똑바로 전해줘야 한다. 그래야 안다. 그래야 이해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꽤 많이.
화를 내지 않고서는 소위 못 알아먹는 것이다. 화를 내지 않고서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니 화를 냄으로써 가르쳐줘야 한다. 당신이 틀렸다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불합리하게 받는 미움을 미워하고 있는 그 당사자에게 말하기 어려워할 것이다. 말하는 게 두렵고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것을 얘기할 때, 더 큰 미움을 받을 수 있을까 봐 속에 담아둘 것이다. 사실은 관계가 호전되길 바라지만, 자신도 그 사람을 미워함으로써 애써 상처를 덮으려고 할 것이다. 혼자 미움받기엔 너무나 억울하고 스스로 초라하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아무리 표현하고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말을 해보지도 않고, 화를 내보지도 않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조금 이른 감이 있다. 그들이 어리석음으로 불합리하게 당신을 미워한다면 넓은 아량으로 한번 더 보듬어주자. 한번 더 다가가 화내주자. 가르쳐주자.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잘못됐고 그 행동으로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굳이 다가가서 말해보자.
생각보다 용기 내어 말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긍정적인 변화가 올 때가 많다. 그들도 당신을 왜 미워하고 있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근데 뭔가 미워하기로 한 것 같아서 미워하는 거다. 굳이 다시 좋아할 이유를 찾기에는 너무 귀찮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당신을 미워하면 안 되는 타당한 근거를 말해주자. 생각보다 잘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 한 번쯤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과 관계가 틀어질 때 용기 내어 사과를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라. 당신의 사과를 받고 관계가 호전되지 않았던가? 당신이 용기 내어 손을 내밀기 전엔 아마 당신을 미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사과라는 것을 통해 당신을 좋아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내가 말하는 '화'와 '사과'는 분명 다르긴 하지만 요지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으면 몰라주는 것이다. 말을 해야 알아듣고 말을 해야 이해한다. 속으로 담아두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당신이 굳이 먼저 다가가지 않는 것처럼 그도(그들도) 굳이 먼저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말을 하자. 표현하자. 화를 내자. 사과를 하자. 그러면 바뀐다. 먼저 다가가서 당신의 속 깊이 담아두었던 말을 해보자. 먼저 다가가 얘기하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고? 잘못 생각했다. 먼저 못 다가가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존심이란 것도 먼저 다가가서 말해보면 알 것이다. 진짜 별거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