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행복하게. 쉽고, 재밌게.
인스타에서 보이는 우리 아이 또래의 어떤 아이가
AR 지수 몇 점대를 읽는다고 했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아이마다 속도는 다르고,
우리 아이는 우리 아이의 길이 있다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실 나는
리딩레벨을 얼마나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는가 보다,
책을 얼마나 오래,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수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아이 책장의 책들을
괜히 한 권씩 다시 꺼내보았다.
글밥이 얼마나 되는지,
그림이 몇 페이지나 되는지,
조용히 넘겨보다 덮어두었다.
남들 책장 속 두꺼운 챕터북이 자꾸 떠올랐다.
‘혹시 내가 너무 천천히 가고 있는 걸까?’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마음이
살짝, 아주 조용히 마음 안에 스며들었다.
조급함은 늘 그렇게 찾아왔다.
겉으론 “괜찮아”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론 어느새
비교라는 이름을 모르는 척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아이를 향해 옆으로,
위로,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는 걸.
레벨이 아니라 감정이 남아야 한다는 걸.
‘지금 아이가 얼마나 읽고 있는가’보다
‘얼마나 기꺼이 책을 펼치고 있었는가’를
나는 더 오래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리딩레벨에 갇히지 말자.
천천히, 행복하게.
쉽고, 재밌게 가자.”
듣기와 그림책.
그게 늘 핵심이었다.
너무 잘 알려져서 오히려 무시되곤 했지만,
결국 거기서 출발해야 했다.
모든 언어의 뿌리는 그곳에 있었다.
듣고 또 듣고, 읽어주고 또 읽어주는 일.
아이가 듣고 자란 문장이
아이가 내뱉는 말로 이어지는 순간까지,
엄마는 계속 같은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사람들은 자꾸 레벨을 말했지만,
나는 리듬을, 감정을,
그리고 언어에 깃든 온기를 먼저 가르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했던 사람.
‘꾸준히 사다 나르고,
아이의 수준과 취향,
그날의 기분까지 살펴
책과 영상을 골라주는 엄마’라는 직업을 가졌던, 나.
생각해 보면
그건 별다른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필요한 건
지치지 않는 애정과
그 애정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일상성이었다.
월팸을 어느 정도 소화하자
나는 이번엔 DVD를 꺼낼 차례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문장 구조가 있는 영상들,
아이의 귀를 간지럽힐 표현들.
그래서 하나씩, 정성 들여 골랐다.
온라인에서 중고로 찾기도 했고,
정품을 여러 번 망설이다 결국 주문하기도 했다.
넷플릭스도, 디즈니플러스도
지금처럼 수많은 콘텐츠를 내어놓던
시절은 아니었다.
아이 수준에 맞고,
자극적이지 않은 영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결국 손으로, 마음으로,
책처럼 한 편씩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둘 쌓이다 보니
책장은 이중주차가 되었다.
DVD와 CD가 겹겹이 쌓였고,
제목이 보이지 않아
손으로 꺼내기 전까진
무엇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책장이 아니라, 영상장이 되었다.
아이의 입맛은 섬세했다.
어떤 날은 잘 보다가,
어떤 날은 “이건 별로야” 하고 꺼버리기도 했다.
순한 맛을 찾아야 했고,
다채롭되 부담스럽지 않은
언어의 톤을 골라야 했다.
시행착오는 당연했고,
그게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데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또 다른 타이틀을 손에 쥐고 있었다.
혹시 이번엔 좋아할까 싶어서.
그 시절, 나는 조금씩 배워갔다.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아이와 함께 발견해 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걸.
영어는 누가 먼저 읽었느냐가 아니라,
누가 오래 좋아할 수 있느냐의 싸움이라는 걸.
비교로 시작하면 조급해지고,
속도로 달리면 금방 지친다는 걸.
그래서 끝까지 즐겁게 가려면,
먼저 좋아하게 해야 한다는 걸.
그래서,
천천히, 행복하게.
쉽고, 재밌게.
그 문장은
그 시절,
아이보다 먼저
내가 내 마음속에 여러 번 되새긴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