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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서 해리포터까지, 아이의 읽기가 자라온 시간

작은 루틴이 쌓아 올린 문장의 결

by 겨울

하루 24시간의 무게는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그 시간을 어떤 루틴으로 채우느냐는 각자 다르다.


우리 집 하루는 오랜 시간 쌓아온

루틴들로 단단하게 엮여 있다.

영어, 한글책, 수학.


이 세 가지는 매일의 바탕처럼 깔려 있고,

그 위에 하루하루의 감정과 계절이 덧입혀진다.

엄마표 영어를 시작으로, 독서와 수학까지,

우리는 그렇게 하루를 쌓아왔다.


아이의 영어는 36개월을 막 넘긴 어느 봄,

우리는 노부영 그림책과 함께 영어를 만났다.

노부영 카페의 드림공부모임에 참여하면서,

매주 스케줄에 따라 그림책을 노출했고,

그것이 하나의 생활이 되었다.

반복은 익숙함을 만들고,

익숙함은 애정을 키웠다.


그 무렵부터 영어책은 늘 곁에 있었고,

그 자연스러운 흐름이

결국 잠자리 독서로 이어졌다.

나는 성우가 된 듯 목소리를 높이고 낮추며

등장인물의 감정을 흉내 냈다.

영어책을 읽은 다음 날에는

그 책의 CD나 음원을 틀어주며

반복 노출을 시도했고,

월드패밀리잉글리시(월팸)의 영상도 적극 활용했다.

아이는 소리에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 책을 따라 소리 내기 시작했다.


여섯 살이 되자 읽기라는 행위가

시키지 않아도 시작됐다.

아이가 곧잘 따라 읽기에

의미 단위로 끊어 읽는 연습을 함께 했고,

엄마와 번갈아 읽는 방식으로

긴 문장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다.

하루에 5~6권 이상은 기본이었다.

짧은 리더스를 다독하며 읽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 ORT 시리즈는

말 그대로 마르고 닳도록 반복해서 보았고,

이야기 속 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은 매번 새로웠다.

수위 아저씨의 정체를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정 많은 할머니가 외할머니일지, 친할머니일지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추측하기도 했다.

늘 반전이 있는 마무리 덕분에,

책장을 덮고도 한참 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5단계에 들어서면서는

매직 키를 갖고 다른 시대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가 등장했고, 단순한 생활 이야기를 넘어

세계사와 역사적 인물로 관심이

확장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노부영 읽기 시리즈 중 하나인 Learn to Read도

함께 병행했다.

둘 다 아이의 읽기 자신감을 키워주는 데

큰 역할을 해주었고,

문장 구조와 어휘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데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일곱 살, 퍼플아카데미 수업을 시작했다.

이미 읽을 줄 아는 상태에서 입학했기 때문에,

다독과 정독에 초점을 두었다.

소낙비 내리듯 영어책을 흡수하며 읽었던 시기였다.

책을 읽고 북퀴즈를 해야 했는데

욕심이 많은 아이에게 AR 퀴즈 점수는

때로 채찍질처럼 작용했지만,

따로 독후활동을 하지 않는 우리 집에서는

책을 정독하며 읽었는지 확인하는

하나의 장치로만 활용했다.


여전히 하루 독서 시간은 1~2시간.

리더스북은 여전히 주를 이뤘지만,

점점 이야기가 길어지는 얼리챕터북에도

관심을 보였다.


여덟 살이 되자 챕터북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얼리챕터북으로는 브랜치 시리즈의

Owl Diaries와 Unicorn Diaries를 유쾌하게 읽었고,

DogMan이나 Horrible Harry 같은 익살스러운 시리즈도 좋아했다.

논픽션으로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키즈 시리즈와

매직스쿨버스처럼 모험을 곁들인 지식책들이 큰 재미를 줬다.


한편으로는

비룡소 그림동화나 네버랜드걸작 그림책의

원서 버전인 칼데콧 수상작들을 여전히 곁에 두었다.

문장이 짧고 그림이 많은 책들이

어느 날엔 더 깊은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말보다 앞서 오는 장면,

문장 사이를 감정으로 채워주는 그림들은

그 시기에도 아이 곁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문장이 점점 길어지고

그림이 사라져 갈수록

아이의 눈은 더 오래 텍스트에 머물렀지만,

어느 날엔 아무 말 없이

그림책 한 권을 꺼내 웃곤 했다.

그림은 감정을 데려왔고,

짧은 문장은 긴 이야기처럼

마음을 건드렸다.

그림책은 여전히

책을 좋아하게 만드는 첫 번째 문이었다.


아홉 살에는 챕터북 중후반부 레벨로 접어들었고,

Judy Moody, Ivy + Bean, A to Z Mysteries,

My Weird School 같은 시리즈를 탐독했다.

여전히 그림책은 함께 읽었다.

아이가 선택한 책들을 나도 같이 읽으며

감정을 공유했고,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친구처럼 웃고 울었다.


이 시기에 Magic Tree House 시리즈는

아주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읽은 책이다.

ORT처럼 다른 시대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구조라서

아이의 반응도 무척 좋았다.

새로운 시대와 장소로의 이동이 익숙하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왔고,

그 덕분에 독서 시간이 자연스럽게 길어졌다.


특히 Merlin Missions 시리즈는

1만 워드카운트 대로 글밥이 확연히 많아졌지만,

아이는 매 권마다 새로운 미션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독서량을 늘렸다.

이 시리즈는 아이가 지금까지 읽은 챕터북 중

가장 애정을 쏟았던,

아이가 말하는 ‘인생 챕터북’이었다.

글밥 늘리기에 가장 효과적인 시리즈 중 하나였고,

읽는 힘을 끌어올려 준 고마운 책이다.


그러나 아이는 어느새
내 손이 닿지 않는 문장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제 이 아이에게는 엄마보다 더 멀리 보는

누군가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섰고,
혼자 설명하던 자리를 이제는, 조금 나누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수업은 선생님이 이끌고,
그 흐름을 지켜보며 다시 짚어주는 일은
여전히 나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열 살이 된 올해,

아이는 드디어 노블의 문을 열었다.

Roald Dahl의 Matilda와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Peter Brown의 The Wild Robot 시리즈를 읽으며

문장과 장면을 글로만 상상하는 법을 익혀갔다.


학원 선생님의 조언으로

Harry Potter에 입문하게 되었고,

7만에서 8만 워드카운트에 달하는

350페이지의 글자는 깨알 같고 그림 한 장 없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어 내려갈 때는

정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 세계에 푹 빠진 아이는

그 세계를 현실처럼 그려내며,

다음 권을 손꼽아 기다렸다.


또, 마음의 나이에 어울리는 뉴베리 수상작들을 읽으며

아이는 문장 속 감정을 따라가고,

인물의 마음에 오래 머무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Because of Winn-Dixie의 따뜻한 말들,

Charlotte's Web 속 조용한 이별의 순간은

아이 안에 천천히 감정을 심어주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 읽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아이는 책의 두께보다 이야기를 보고,

그림 대신 문장의 결을 만져간다.

나는 가끔, 책에 파묻힌 아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마음을 다잡는다.

말보다 먼저 크는 것은 언제나,

저런 몰입과 고요함이었다.


한글책 독서는 영어만큼 꾸준했다.

잠자리 독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잠수네 위클리 리스트를 참고해

매주 도서관에서 책을 공수해 왔다.

한글책 역시 장르와 수준을 조화롭게 읽혔다.


유아기에는 그림책이 중심이었고,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는 문고판도 곧잘 읽었다.

책에 대한 호기심은 언어를 가리지 않았다.


매일의 연산도

어느새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긴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하루 10분, 2~3장씩 풀어온 루틴은

아이의 리듬을 다잡아주는 기둥이 되어주었다.


우리가 하루를 쌓아온 방식은

그렇게 단단하면서도 유연했다.

이 모든 루틴의 중심에는

“매일 조금씩”이라는 원칙이 있었다.

무리하지 않고, 다그치지 않고.

단단하고 유연하게,

우리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왔다.


작은 씨앗처럼 심어 놓은 루틴들이

이제는 줄기와 잎을 뻗어,

아이의 언어와 생각을 키우고 있다.

하루하루의 작고 단순한 반복이

결국 아이의 마음을 자라고,

생각을 깊어지게 했다.


그 모든 꾸준함이

아이를 키운 진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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