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사랑하게 만드는 법은 숫자에 없다
책은 그때도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자주 쓰지 않는 전등 아래,
살짝 기울어진 책장의 두 번째 칸쯤엔
아직 펴지지 않은 페이지들과
읽다 말고 덮어놓은 책갈피,
‘언젠가는 꼭 읽겠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던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아이의 작은 의자 하나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몇 해 전,
읽는 아이를 바라보며 하루를 살았다.
처음엔 소리 내어 읽는 목소리만으로도 대견했고,
책장을 넘기며 깔깔 웃을 때면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그 웃음 하나로 하루가 위로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고,
언제부턴가 ‘이 시기엔 몇 권을 읽어야 한다’,
‘AR 지수는 몇 점이어야 한다’,
‘하루 몇 분 이상은 읽혀야 한다’는 식의
숫자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참고용이라 여겼지만,
그 숫자들은 점점
내 마음에 자리를 잡았고,
어느 날부턴가는
아이에게 건네는 나의 말투 속에도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 숫자들이
내게 불안이라는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고,
또 어떤 날엔
아이에게 던지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책을 읽는 그 시간을
‘기록해야 할 무언가’로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몇 분이나 읽었지?’
‘퀴즈 점수는 몇 점이지?’
이런 질문들이
내가 먼저 묻지 않아도
머릿속을 먼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하기 싫은 아이를 붙잡아 억지로 책을 읽히는 것,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한 리딩은
결국 이 아이의 언어 감각을 넓혀주거나
사고력을 깊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영어’라는 말 앞에
피로감을 덧씌울 뿐이라는 것을.
책을 좋아하게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정작 책 앞에서
아이를 재촉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건 내가 바라는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고,
내가 아이에게 남기고 싶은 감정도 아니었다.
그 시절, 아이는 하루 두 시간쯤을
놀이터에서 보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그 위로 햇살이 흘러내렸다.
그늘진 그네에 가만히 앉아,
아무 말 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보던 시간들.
그 시간은 숫자로는 환산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아이의 몸과 마음을 자라게 하던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오후들은
지금이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유년의 몇 안 되는 풍경들이었다.
나는 그 소중한 시간을
리딩 지수 같은 것으로 덮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바랐던 영어는
속도나 분량으로 단단해진 실력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치화된 언어는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가 바랐던 건
책을 읽고,
그 안에서 어떤 생각이 솟아오르고,
그 생각을 자신의 말로 꺼내 놓을 수 있는 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모호함을 견디는 문장력 같은 것이었다.
그건 단기간에 쌓이는 게 아니었고,
그렇기에 우리는 조심스러웠고,
더디더라도
천천히 걷기로 했었다.
내가 욕심을 부릴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곧 아이는
자신만의 언어를 갖게 될 것이고,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설 테니까.
그 시점은
느닷없이 찾아왔고,
예상보다도 조금 일찍 다가왔다.
그래서 그때까지만이라도,
나는 아이의 하루와 마음을
천천히 바라보고 싶었다.
속도보다는 방향을,
결과보다는 분위기를 기억하는
그런 독서의 시간이길 바랐다.
책장 한 장을 넘기기까지의
머뭇거림마저도
의미로 남겨질 수 있기를.
그때 너는 일곱 살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일곱 살의 마음을 앞에 두고 서 있었다.
매일의 순간이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그 하루하루가
억지로 기억되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남기고 싶었던 건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지에 대한
조용한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