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장 모였네 지금 바꾸러 갈까 귀찮다. 20장 더 모아서 바꾸러 가야겠다'
같은 방향으로 일정하게 잘라 말려놓은 1리터 우유팩이 80장 모였다.
팩을 모아 주민센터에 가져다주면 10장당 1장의 쓰레기봉투와 바꿀 수 있다.
20장이건 30장이건 상관없이 그것도 아쉬워 바로바로 바꿔 쓰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귀찮다'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삶이 편안해졌나 보다.
'몸으로 때우는 며느리다'라는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30대 나는 지독한 보릿고개를 맞이했다.
고단했던 시절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내 화장대 거울엔 사진 한 장이 붙어 있다.
사진 속 아들과 딸은 컵라면 하나를 가운데 두고 나무젓가락에 걸려 있는 한 가닥의 라면을 먹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이때 아이들의 나이는 7살 4살이었다.
어린이집 겨울방학이었다.
신나는 곳을 데리고 갈 형편이 안 되어 남편이 궁리해 생각해 낸 곳은 시댁 근처 논에 물을 대어 얼려 놓은 썰매장이었다. 당시 남편과 내가 가지고 있었던 현금은 만원. 큰아이 작은아이가 탈 썰매 하나씩 빌리는데 각 3,000원씩 6,000을 썼다.
추운 줄도 모른고 신나게 썰매를 탄 아이들의 볼은 빨갛게 텄고. 콧물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춥다, 몸 좀 녹이고 다시 나오자"
라며 논 옆에 임시로 지어놓은 비닐하우스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하우스 안에는 고소하고 따뜻한 군고구마, 달콩한 냄새 풍기는 믹스커피, 얼큰한 국물의 컵라면과 어묵을 팔고 있었다.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것을 모두 사 주기엔 가지고 있는 돈이 턱 없이 부족했다.
"하나만 골라봐. 간단하게 먹고 할머니네 가서 저녁 맛있게 먹자. 할머니한테 조기 구워달라고 하자 "
아이들은 군말 없이 수긍하고 컵라면 하나를 집었다. 그곳에서 파는 컵라면은 끓는 물과 김치를 포함해 3000원. 부부는 남은 1000원으로 믹스커피 한봉을 사서 나누어 마셨다.
지금 생각하면 부부가 어쩜 그리 융통성이 없었나 모르겠다. 이왕 시댁까지 갔으니 어머님께 몇만 원 빌려도 되었을 텐데
자존심 때문은 아니고 그저 부부는 돈이 없어 힘들다는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부부는 게으르지 않았다.
남편은 열심히 일했지만 월급을 제때 받지 못했다. 이직하는 회사마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항상 성실했다.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며 파트타임 일을 했고. 저녁이면 가정부업을 하였다.
노동과 수입은 비례하지 않았다.
여러 사정에 의해 생긴 어려움을 이겨 내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작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났을 때 취업을 하기로 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국가 지원이 필요했다. 오래전 일이라 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당시 보육료는 아이당 30만 원 정도였고, 요즘처럼 연령에 따라 모두 지원해 주던 시대가 아니었다. 주민센터에 가서 보육비 지원 신청을 했고. 그것이 통과되면서 우리 가정의 계급은 차상위 계층이 되었다.
자격지심이었을 것이다.
주민센터 직윈의 눈초리에서 읽히는 말들
'젊은 사람이 열심히 일할 생각을 안 하는 건가?'
'교육비가 얼마나 든다고'
잔액이 찍혀 있는 통장 사본까지 보여주고서야 작은 아이 어린이집 보육비를 전액 지원받을 수 있었다.
주민센터에서 나오는 쌀을 받지 않았다.
쌀은 농사짓는 시댁에서 주셨기도 했지만 쌀을 받으러 가는 내 모습이 창피해서.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남편의 회사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들고 나도 어느 정도 일터에서 자리를 잡은 뒤 차상위계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아끼던 습관 중 하나가 우유팩 모아 화장지로 바뀌 쓰는 것이었다.
-당시 살던 곳의 주민센터에선 화장지로 바꿔 주었었다.- 습관이 무섭긴 하다.
아직도 우유팩은 그냥 버리지 못하겠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궁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그저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