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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남책 Oct 20. 2024

28장. 허지광 vs 여진 vs 서형사

행운의 여신

28장. 허지광 vs 여진  vs 서형사




세무조사는 무사히 잘 끝났다.

처음 예상보다는 꽤 많이 줄어든 금액이었지만, 지광에게는 그 금액조차도 자신의 컴퓨터 매장을 정리한 후 모든 자금을 털어 넣어야만 하는 큰 금액이었다.


부족한 생활비는 대출금으로 충당하고 결국 가족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밀로 했는데, 사실대로 말해도 가족들의 걱정만 늘어날 뿐이라는 생각과 이 위험했던 일에 가족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김 의원에게 납치당했을 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 불똥이 가족들에게 튄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지광은 모든 사실을 숨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벽장 금고에 있는 현금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그 유혹을 끝까지 참았다. 아무리 돈에 환장한 자신이라도 그것이 김 사장에 대한 본인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급하게 생활비로 충당될 현금 정도는 빼서 사용했지만, 그 금액을 제외하면 대부분 돈이 그대로 있는 것이니 양심에 거리낄 것은 없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 돈은 앞으로 매장을 운영하기 위한 보험 성격이기도 했는데 고객들의 특성상 현금거래나 무자료 거래를 많이 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얼마 전 김 사장의 장부를 파헤치며 단골손님들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더니 모두 흔쾌히 지속적인 거래를 약속해 주었다. 대부분 유명인이라서 어떤 기록이 남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래서 이 현금은 꼭 필요했다.


물론 말뿐인 약속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라도 고객들과 접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 사장의 사업을 자신이 위임받아서 그대로 운영한다는 사실이 신뢰를 준 듯했다. 그래서 지광은 앞으로 꼭 그들의 마음을 얻어 자신의 인맥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 일은 인맥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주변 음향기기 매장의 사장들이 지광에게 슬쩍 운을 띄우며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매장의 장비들을 매입하려고 시도했었다.


“야, 네가 뭘 한다고 그러냐? 그냥 나한테 물건 넘기고 뒤로 빠져. 이 일은 초짜들이 덤빌 수 있는 게 아니야.”


 지광은 여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화가 났고 물건 가격도 제대로 모르는 반푼이 취급을 당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 이 인간들이 누굴 빙다리 핫바지로 아나?’


지광은 그들의 제안을 듣자마자 단칼에 거절했는데 이제 경쟁 관계가 된 그들에게 더는 굽신거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와 다른 지광의 태도에 약간 움츠러든 사장들이 놀란 눈을 했다. 그동안 자신들에게 설설 기며 굽신거리던 지광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양아치 같은 놈들. 인제 와서 친한척하는 것도 꼴사나운데, 1억이 넘는 제품을 어디서 천만 원에 사 가려고 수작질이야? 누굴 호구로 아나! ’


지광은 자신이 또 한 번 그들에게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어 매우 기분이 나빴다. 씩씩거리며 괜히 바깥을 향해 분풀이하듯 돌아섰는데 그때 매장의 유리를 통과하여 낯익은 실루엣이 지광의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였다. 여진. ‘

저 원수 같은 년이 여기는 무슨 일이지? 그날 경찰에 안 잡혔었나?’

당시에는 손발이 묶이고 위협을 당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가녀린 여자랑 1대 1 상황이었기에 딱히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지광은 당당히 걸어가 문을 열며 말했다.


“ 무슨 일이야? 네가 준 담배 한 개비가 지금도 기억나는데 여길 찾아오다니 용기가 대단하시네. ”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도 여진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지광에게 진지한 눈빛을 보내며 매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주변을 슬쩍 둘러본 후 조용하게 말을 꺼냈다.


“ 아마 여기에 있을 거예요. ”


“ 뭐가? "


“ 현금이요. 김 사장이 관리하던 김 의원의 비자금이 여기에 있을 거예요. 같이 찾은 다음 나누어 쓰시죠. 어차피 그 돈 잘 못 건드리면 지광 씨는 죽은 목숨이에요. ”


여진의 협박과 같은 말에도 지광은 시침을 뚝 떼며 태연하게 반응했다. 사실 문 앞의 여진을 발견하자마자 현금 때문에 왔을 거라고 예상했었기 때문에 할 말과 행동을 순간적으로 생각한 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 아하, 이 돈이 김 사장 돈이 아니라, 김 의원 돈이었어? ’


지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부터는 양심의 가책 없이 편하게 써도 되는 돈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지광은 여진에게 잠시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하이파이 음향기기들을 둘러보며 어떤 것이 좋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하나를 선택해서 음악을 틀었다.


“ 일단 음악 감상 좀 하면서 얘기합시다. 난 기분이 더러울 때 음악을 들어야 하거든. ”

지광은 은근히 여진을 돌려 깠다.     


지광의 부드러운 조작으로 매장 안에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비록 청음실에서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음악의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한 사운드가 흘러나왔고 조급해 보이는 여진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여진은 엉뚱한 지광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협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지광과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다물고 감정을 숨겼다.


‘ 쳇, 답답해 미치겠지? 내가 네 머리 꼭대기에 있다. 요년아. ’

    

여진은 그동안 자신의 업무와 과정을 지광에게 상세히 얘기했다.

김 의원과의 관계와 김 사장과 변 사장의 죽음. 그리고 지광에 관한 얘기까지…. 제 와서 더 숨길 것이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말한 후 다시 본론을 얘기했는데 지광은 얘기를 듣는 도중 몇 번이나 불같이 화를 냈다.


“ 아니, 그럼 나만 계속 모르고 있었던 거야? 이런 큰일에 끌어들여 놓고…. 와…. 나만 병신이었던 거네….”


 여진의 결론은 뻔했다.

모든 것이 붕괴된 지금, 자신의 도피를 위해 급하게 돈이 필요하니 김 의원의 현금을 함께 찾자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돈에는 자신의 지분도 있다고 떠들어 댔다. 여진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지광은 이마를 찌푸리며 계속 듣기만 했다. 그리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오물거렸는데 그 말은 여진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 근데 내가 여기 매장을 싹 다 정리했는데 금고 같은 건 본 적이 없어. 혹시 다른 곳에 둔 건 아닐까 싶네. ”


지광의 말에 여진은 바로 부정의 손짓을 하며 말했다.

“ 여기가 맞아요. 예전에 김 의원의 급한 요청으로 현금을 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김사장이 매장에서 바로 가지고 나왔었거든요. ”


어느새 LP는 마지막 연주곡을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광은 판을 뒤집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슬쩍 바깥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오세요? 시간 끄느라 너무 힘들었잖아요. ”

지광은 매장 밖에 있는 남자를 향해 큰 소리로 웃으며 얘기했는데 거기에는 서 형사가 안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지광은 여진이 매장 안으로 들어온 후 핸드폰으로 서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책상 위에 두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를 서 형사가 모두 들을 수 있었고 서 형사를 비롯한 팀원들은 그 즉시 출동해서 여진이 도주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혹시나 다른 사건으로 출동한 상황이었다면 낭패가 될 수도 있었지만, 오늘도 서 형사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한 번의 출동으로 대어를 낚는 백발백중의 행운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서 형사는 매장 안의 여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젠장, 내일 또 책 한 권 늘어나겠네. 나도 노력파고 실력파인데….’     


“ 후회하실 거예요. 그 돈 건드리면….”


여진의 목소리는 억눌린 분노로 떨리고 있었는데 가느다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지광을 협박했다. 지광은 살짝 흠칫하며 고개를 돌릴 뻔했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난 모르는 일이라는 듯 어깨만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 그 돈이 여기 매장에 있는 게 맞는다면 내가 잘 찾아보고 있을 테니 넌 감방에 가서 김 의원 뒤나 닦아줘. ”


 지광의 말에 여진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강한 눈빛을 보냈고 그 눈빛에는 불타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이내 서 형사가 팔짱을 끼고 힘껏 뒤로 돌린 탓에 더는 노려볼 수 없었다.   

   

“ 아 참. 서 형사님. 내년에도 수학대항전에 참가하실 거예요? ”

갑작스러운 지광의 물음에 서 형사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서 형사의 대답에 지광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추가했다.


“ 애들 수학학원에서 하는 대회 있잖아요. 형사님이 올해 우승하셨던….”

그제야 서 형사는 진짜 놀랍다는 듯한 액션을 취하며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쑥스러운 듯 이내 머리를 긁적였는데 아마 누가 알아보는 게 당황스러웠던 것 같았다.


“ 사실 전 운이었어요. 대회 전날 밤에 잠깐 몇 문제 풀어봤었는데, 그 문제들이 그대로 나왔거든요. 제가 잘해서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


자꾸만 겸손해하고 쑥스러워하는 서 형사를 보며 지광은 왠지 모를 승부욕이 더 불타올랐다.  


“ 올해는 제가 졌지만, 내년에는 다를 거예요. 형사님. 내년에도 꼭 참가하세요. 제가 반드시 이겨드릴게요! ” 지광의 뜬금없는 선전포고에 서 형사는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은 생각을 하며 여전히 당황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내 여유를 찾고 긴장이 풀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 네. 참가할게요. 근데 전 운이 좋은 편이라, 내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아무튼 내년에는 꼭 저를 이기시길 바랄게요. 그리고 오늘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지광 씨 덕분에 세상이 크게 뒤집어질 만한 범인을 잡았어요”


지광은 서 형사의 마지막 말을 듣고 ‘설마 내년에도 운이 따르겠어?’라고 생각하며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


“ 형사님이 제 목숨을 살려 주신 은인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혹시나 더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지광은 마지막 말을 뒤로하고 여진의 주머니에 담배 갑을 넣어주며 살짝 윙크를 날렸다.      


서 형사와 여진이 매장에서 나간 후 모든 것이 해결되었음에도 지광은 뭔가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운이라니….’

서 형사의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아….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은 실력보단 운인가? ’


지광은 갑자기 자조 섞인 한숨을 내뱉었는데 그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운 좋게 많은 것들을 얻었는지 깜빡 잊고 있었다.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을 한순간에 다 가지게 되었음에도….     


       

‘ 자, 이제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안 들키고 잘 쓸 수 있을지 고민해 볼까?’


현금다발이 가득한 금고를 떠올리자, 지광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돈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고 눈을 감으면 현금 뭉치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특히 양심의 가책 없이 마구 써도 된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광은 그렇게도 바라던 음향기기 매장과 엄청난 현금을 쌓아두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는데 놀랍게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만족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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