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허지광 vs 김신욱
얼마 전 놀라운 소리의 세계를 소개해 준 김 사장이 갑자기 라운딩을 하러 가자고 했다.
지광의 일정이나 사정을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다. 4명으로 맞춰놓은 예약인데 한 사람이 사정이 생겨서 빠지게 되었다는 설명이 추가될 뿐 지광에게 결정권은 없어 보였다.
다만, 그린피는 이미 자기가 결제해 둔 상태라 카트비와 캐디피만 내면 된다고 하니, 지광도 은근 구미가 당겼다.
땜빵과 같은 상황에서 명령처럼 받은 제안이지만 지광은 김 사장이 이렇게 자신을 불러주는 게 한편으로 고맙기도 했다. 심지어 묘한 미소로 좋은 기회라는 것을 슬쩍 알려주는 모습에 살짝 기대되는 것도 있었다.
‘ 에이, 짠돌이 같은 인간. 기왕이면 다 내주지….’
지광은 고마워하면서도 내심 일부의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에 살짝 불만인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새벽 5시. 지광은 알람 소리에 일어나 급히 골프백과 보스턴백을 챙겼다. 사실 어제 어느 정도 챙겨뒀지만, 항상 뭔가 빠트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기에 다시 한번씩 가방을 확인했다.
‘ 공을 좀 더 챙겨야 하나? ’
최근에 연습을 못 해서인지 자신 없는 마음에 왠지 더 많은 공을 챙겨야만 할 것 같았다. 특히 이렇게 연습이 부족할 때는 1개에 5천 원 정도 하는 비싼 공을 날려 먹을까 봐 일부러 싸구려 공을 들고 가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아까운 느낌이었다.
도로에 나가니 이 새벽 시간에도 꽤 많은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 와아,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
이렇게 혼잣말은 했지만, 자신은 골프 치러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 속마음으로는 살짝 뿌듯하기도 했다. 1시간 반 정도를 달리니 골프장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고 길가 커다란 돌에 비석처럼 새겨진 골프장의 이름을 확인한 후 조용한 오솔길을 따라 이어진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오르막길의 끝을 지나 주차장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곳엔 이미 차들로 가득했다.
‘ 도대체 불경기는 어느 나라 말이야?’
지광은 괜히 한마디를 내뱉고는 클럽하우스 앞에 스르륵 정차했다. 창문을 내려 근무자들에게 보스턴백도 함께 내려달라고 얘기한 후 룸미러로 확인하며 기다리는데 자신의 차가 남들에 비해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다.
‘ 휴…. 난 언제 저런 차들 몰아보나…. 조금만 더 좋은 차로 바꾸고 싶다.’
지광은 주차장을 한 바퀴 돌며 조금이라도 넓은 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문콕이 너무 싫기 때문이었다. 고급 차는 아니지만, 문콕을 당하는 건 왠지 불필요한 피해를 입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지광은 차라리 좀 더 걷더라도 차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지 않는 자리를 찾아 주차하기를 원했고 귀찮았지만, 주차장의 제일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제발 내 차를 건드리지 말아 줘.’
락카에서 옷을 갈아입고 스타팅 장소로 갔더니 김 사장이 담배를 튕겨 끄고 나를 향해 인사하는데 그 바로 옆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두 명이 함께 있었다.
풍만한 가슴이 두드러지는 딱 붙는 골프티셔츠에 늘씬한 허벅지가 돋보이는 짧은 미니스커트, 그리고 골프 패션의 완성인 긴 무릎 스타킹까지….
사실 흔하디 흔한 골프복장이었지만 그 여자들이 입은 옷은 어딘가 모르게 야하게 느껴졌다. 역시 아무리 치장을 해도 사람의 내면은 다 숨길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지광은 이내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 돈이 많으면 이런 여자들이랑 골프도 칠 수 있는 거구나. ’
지광은 괜히 김 사장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다. 그리고 하루빨리 김 사장처럼 고급 음향기기 매장을 오픈하고 저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순진한 척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하게 인사하는 지광을 보며 김 사장은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 오늘 좋은 기회라고 내가 얘기했었지? 잘해봐 크크크”
김 사장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면서 한쪽 눈과 입을 씰룩거리며 다 들리는 소리를 비밀 얘기인 척 떠들어댔다.
“ 자, 여기는 내 애인 여진이, 그니까 이쪽은 관심 끄고 저쪽만 신경 써”
사실 둘 다 미인이라서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김 사장의 애인이 좀 더 자연스럽게 생겼고 자신의 파트너는 수술한 느낌이 너무 많이 나는 얼굴이었다.
‘ 뭐, 어때?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니고….’
“ 자 반갑습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지광은 즐거운 라운딩을 위해 파이팅 하며 한 명씩 악수했다. 형식적으로 한 악수이지만 그녀들의 손바닥 감촉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지광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기 시작했다.
“ 얘들아, 우리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을 테니 너희가 커피 좀 사 와라. 티업시간이랑 내 이름 말하면 되는 거 알지? ”
김 사장은 여자들에게 슬쩍 심부름을 시키고 손가락 두 개를 입 근처에 갖다 대며 둘이서 담배 피우러 가자는 손짓을 했다.
“ 김 사장님, 와 대단하시네. 저런 아가씨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지내시는 거예요?”
“ 사실 얘네들 연예인 지망생들이야. 얼굴은 예쁜데 연줄이 없어서 내가 스폰을 좀 해주고 있어. 나 말고도 스폰서가 몇 명 더 있는 것 같던데 어쩌겠어. 내가 다 책임질 수 없으니 이래저래 문어발 치는 거 정도는 눈감아줘야지 뭐.”
‘ 역시 돈이었다.
’ 저렇게 예쁜 여자들과 즐길 수 있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된 지광은 다 태운 담배를 세게 비벼 끄며 자신도 곧 그렇게 될 거라 다짐해 본다.
“나이스 샷.”
김 사장이 엉성한 야구 스윙으로 엉뚱한 곳에 공을 날려 보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하나같이 나이스 샷을 외쳤다.
“ 공은 안 죽었지? ”
슬라이스가 나서 우측으로 많이 꺾였기에 누가 봐도 죽은 공인데 김 사장은 괜히 캐디에게 물어보며 부담을 줬다.
“ 아마 저쪽 큰 나무 아래에 가면 공이 있을 것 같아요.”
캐디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했는데 그 말을 들은 김 사장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캐디는 저 깊은 러프에서 공을 찾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공 한 개를 슬쩍 두고 오던지….
“ 오늘 공이 잘 안 맞네?”
김 사장의 한마디에 여진이 답한다.
“ 스윙은 좋은데 오늘 윗바람이 많이 있나 봐요. 그냥 다시 한번 치세요 ”
‘ 그래. 저 말이 정답이었다. ’ 여진의 응대를 보고 지광은 자신도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는 방법을 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런 게 진정한 접대용 멘트구나. ’
카트에서 캐디의 옆자리는 상석이다. 혼자 앉을 수 있기 때문에 보통 연장자가 타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늘은 지광이 앉았다.
김 사장이 뒤 열에 있는 두 여자 사이에 자연스레 탑승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지만, 지광은 은근히 아쉬움이 남았다. 좀 전에 슬쩍 돌아보니 김 사장은 여진의 다리를 쉴 새 없이 주무르고 있었는데 지광은 그 이후로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캐디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스럭부스럭 소리에 신경은 쓰이지만 절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 저 인간들 우리를 앞에 앉혀놓고 뭔 짓거리를 하는 거야. ’
아마도 서로 어딘가를 만지며 놀고 있는 것 같은 데 정말 보지 않아도 다 느껴졌다.
‘ 이게 육감이구나. ’
오늘 지광은 책으로 공부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라운딩이 끝나고 김 사장은 식사하자고 했지만, 지광은 매장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다고 급히 나섰다. 김 사장은 아쉬운 얼굴을 하며 밥도 안 먹고 그냥 가냐고 물어왔지만, 심하게 붙잡지 않는 걸 보니 셋이서 노는 게 더 낫다고 판단을 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지광도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들과 오늘 하루 즐겁게 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왠지 저 사람들과 어울리면 안 될 것 같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 어차피 꼬셔봐야 김 사장만큼 돈도 써야 할 테고 그런 거라면 난 됐어.’
지광은 그런 멍청한 스폰서 짓은 안 한다고 생각하며 본인의 결정을 합리화했다.
“ 자,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재밌게들 노시고 다음에 뵐게요”
웃으며 인사를 하고 몇 초쯤 지나서 뒤를 돌아봤는데 두 여자가 김 사장의 양쪽 팔짱을 나눠 끼고 애교를 부리며 걸어갔다. 아마 저 정도의 깊은 팔짱이면 남자의 팔에 여자의 젖가슴이 다 느껴질 것이었고 그건 누가 봐도 유혹이었다.
‘ 빠지길 잘했다. 어차피 둘 다 김 사장의 애인이었네. 쩝. 오늘 둘 데리고 혼자 애 좀 쓰고 오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