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아픈 손가락으로 남겨진 미완의 작업물이 있다. 웬만해선 작업에 끝을 보는 성격이지만 이 작업은 도저히 내 상상력만으로는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기가 못내 아쉬워 현재는 노트북 이름 모를 폴더에 고스란히 동면 중이다. 그것은 바로 로맨스 소설, 내 첫 성장형 소설이다.
이 소설은 캐주얼 바에서 일을 하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소설로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이 때 나는 A와 썸 아닌 썸을 타고 있었고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 나는 이 감정을 글로 풀어내고 싶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나는 인생에서 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작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지, 아니면 글은 단지 취미생활로만 여기고 안정된 직장에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로맨스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철학적인 문제를 다뤄보면 어떨까하는 열망이 들었다. 그렇게 쓰기 전부터 나에게서는 일종의 도파민이 마구 분출되었다.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것이 내 능력의 한계였지만 경험에 빗대어 상상력을 자극한다면 이런 글을 써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애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로맨스의 서사를 단순하게 풀고 주인공이 지닌 문제를 사회 구조와 연결시키다 보면 그럴싸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 여겼다. 남주 캐릭터의 정체성에 나를 대입하며 본격 시뮬레이션 연애 게임을 시작했다. 여주 캐릭터에는 A의 성향을 일부 반영하고 싶었으나 어쩌다 글을 쓰다 보니 점점 여주의 성격도 나와 비슷한 지점으로 흘러갔다. 때마침 사정상 재취업 하는 기간에 들어서게 된 나는 스스로에게 한 두달의 충전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이 기간에 소설을 70% 완성 짓고 나머지는 일을 하며 천천히 글을 마무리하자고 생각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남주의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가진 경험담을 적재 적소에 배치 시켰다. 외로움을 타고 과거에 어떤 도전을 했으며 현재의 꿈이 무엇인지, 그러나 현실은 얼마나 시궁창인지 나는 글을 쓰면서 캐릭터에 십분 감정이입을 했다. 여자 편의 이야기를 쓸 때는 적당한 판타지를 심어 넣었다. 직업은 의사로 설정했지만 과목은 정신과로 정했다. 남자는 심한 감정동요를 겪는 중이었고 여자의 취미는 독서였다. 나는 남주의 생계상 직업을 내가 경험한 바텐더로 설정하며 서로가 우연히 마주할 수 있는 복선들을 곳곳에 깔아 두었다. 그리하여 둘은 마침내 가벼운 대화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개연성이 확보되었다. 나는 소설 밖 관점에서 절대자가 되어 이 둘의 자연스런 만남에 의식의 흐름이 느껴지는 대로 글을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의 진전은 이뤄지지 못한 채 소설 속 캐릭터는 현재도 주구장창 가벼운 대화만 오가고 있다.
소설이 더는 진행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아쉽게도 경험 또는 공감의 부재 때문이었다. 알고 지내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었으나 이들이 만나고 연애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내 의식의 흐름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어느 단계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고 남주와 여주의 관점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감정선을 그려낼 수가 없었다. 덧셈, 뺄셈을 잘해 늘 100점을 맞아도 곱하기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느낌이랄까? 나는 경험한 부분에 대해서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때 소설을 쓰면서 처음 깨달았다.
한 동안 며칠을 거쳐 계속 전개 구상만 떠오르다 결국 접었다. 글쓰기는 전형적인 몰입형 활동이라 어느 순간 탄력을 받는 지점들이 오기 마련인데 이 소설의 전개부분에서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계속 인위적인 문장들만 써지게 되고 주인공이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한글문서로 19장이나 썼을 만큼 애정을 지닌 소설이었지만 나는 잠정중단을 선언하며 기회를 미루기로 했다. '시인의 계절'. 미완으로 남긴 내 소설의 제목이다.
언젠가는 완성시키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