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신과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몇 달 전 직장과 가정일을 병행하는 것도 힘들고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해져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적이 있었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견딜 수 없어 직장 근처 정신과에 처음 방문했다. 주치의와의 첫 대화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오셨죠?”
“선생님 제가 번아웃이 온 것 같아요. 밖에서 일도하고 집에서 육아도 하니 너무 지친 것 같아요. 아내가 그것에 대해 알아주지 않아 다투게 됩니다. 너무 힘들어요”
“번아웃은 없습니다.”
“네?”
“번아웃은 없어요. 그게 자기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셔서 그래요. 자기일이 아닌데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런거에요. 육아가 본인 일이라고 한번 생각 해보세요. 아내분이 없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때는 본인이 전부 다 당연히 해야 되지 않겠어요? 제가 생각했을 때는 오히려 아내분이 많이 답답하실 거 같아요.”
처음에는 이게 뭔 소리인가 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병원을 바꿔야 하나 고민도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 다른 남성들 보다 육아를 신경을 많이 쓰는 특별한 남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아내가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내는 육아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나의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 했고 그러다 보니 나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아 불만이 하루이틀 쌓여만 갔다. 아내가 없다면 아이들 돌보고 집안일 하는 것은 당연히 나의 일이었고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반드시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시켜서 하거나 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하는 것은 본인을 위해 하는 것이기에 불만이 쌓일 수 없다. 의사는 나의 증상을 듣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먹고 몇 주 후 난 괜찮아 졌다.
정신과 의사와 첫 대면한 순간에는 하고싶은 말이 사실 더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은 내 생각 과는 다른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신과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는 나의 증상 뿐 아니라 내가 생각 한 병의 원인 등을 조리 있게 말해야겠다 싶어 나름의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실제 병원을 가서 의사를 대면해 보니 그곳은 심리 상담소처럼 나의 성장과정이나 무의식을 탐험하는 곳이 아니었다. 짧고 굵게 자신의 증상을 얘기하고 그에 맞는 약을 처방해주는 일반 병원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의 증상은 극도의 답답함과 불안감, 무력감이었고 의사는 그 증상을 가라 앉히는 약을 주었다. 병원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다른 환우들도 내 예상과는 달랐다. 주로 여성이 많았지만 간간히 중년 남성, 청소년도 있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 혹은 친구나 동료와 같이 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감기에 걸려서 내과나 이비인후과를 방문하는 사람들 보다 덜 아파 보였다. 그러한 분위기 여서 그랬는지 처음 들어가는 것만 어려웠을 뿐 그 이후 부터는 마음 편히 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진료시간은 점점 더 짧아 졌다. 주치의는 나의 상태를 체크하고 그에 맞는 약을 주었으며 난 그 약을 먹고 일상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병원에 갔었다. 하지만 나이 마흔에 정신과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벼운 감기에만 걸려도 병원에 가지만 우울증과 같은 정신 질환에 병원을 가는 것은 극도로 꺼리는 것 같다. 아마도 조현병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유난히 정신력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심리상담소와 헷갈려 본인의 과거를 이러쿵 저러쿵 털어놓아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부담감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감기에 걸렸다고 병원가서 왜 걸렸는 지까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콧물이 나는지 기침이 나는지 증상을 얘기하지 친구와 물놀이하다 면역력이 약해진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내가 겪은 정신과는 그런 곳이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40년 동안 살면서 정말 많은 일과 변화를 겪는데 가벼운 우울증 하나 없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 같았고 이제야 정신과를 가다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무사히(?) 약을 끊을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정신과를 다시 갈 것이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다.
첫 방문도 어려웠지만 완치 후 두번째 방문은 사실 더 어려웠다. 정신과를 다시 가는 것이 마치 인생 실패의 문턱에 서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지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속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늪은 정신과 진료나 우울증 약이 아니라 우울증 그 자체인데 말이다. 결국 약을 다시 먹고 나서야 난 늪으로 간 것이 아니라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누군가의 손을 잡은 것임을 깨달았다.
재방문 한 것에 주치의는 다소 놀란 것처럼 보였다. 직전 진료 당시 삶에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주치의는 내 얘기를 듣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검색해보니 최소 용량이었다. 아마 차후 내 상태를 듣고 약을 늘려 나가려는 전략인 것 같았다. 플라시보 효과였겠지만(검색에 따르면 2주는 지나야 약 효과가 나온다고 한다.) 약을 먹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약 한달동안 왜 다시 가는 것을 고민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에 갔으면 시간을 절약하고 더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약을 먹을 때 마다 마음의 감기약을 먹는 다 하며 마음을 달랬다. 사실 정신과 약이 감기약 보다 훨씬 크기도 작고 개수도 적어 먹기 편했다.
정신과 약을 먹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한번 먹으면 최소 6개월 정도는 먹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의 병이 있어 일상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보다 비타민 먹듯이 매일 약을 먹고 최대한 빨리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인생의 큰 틀에서 이득이 되지 않나 싶다. 두번의 정신과 방문은 사실 문턱을 넘기까지 많이 망설였지만 이제는 마음의 감기라 생각하고 좀더 가볍게 고민없이 가볼까 한다. 다른 이들도 내 경험을 발판삼아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혼자 버티지 말고 전문의와 약의 도움을 받아 보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