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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의 답장 다른 지도를 손에 쥔 아이에게

그때의 너에게, 지금의 내가

by 달빛서재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가끔 그 아이의 책상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약사’라는 선명한 꿈이 적힌 계획표가 붙어 있던 책상, 그 앞에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아가던 사촌 동생. 반짝이던 그 아이 앞에서, 제 손에 들린 새하얀 백지 지도가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정해진 길을 망설임 없이 걸어가던 그 아이의 단단한 뒷모습은, 제게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다른 세상의 풍경이었다. 그 부러움의 크기만큼, 제 마음속에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막막함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곤 했다.


나는 다른 종류의 지도를 그려야만 했다


그 아이가 부모님이 그려준 안전한 지도를 따라 탄탄대로를 걷는 동안, 나는 길이 없는 곳에서 직접 길을 만들어야 했다. 넘어지고, 헤매고, 때로는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했다. 그래서 저의 지도는, 목적지로 향하는 깨끗하고 반듯한 직선 도로가 아니었다.


네 지도 안에는 땀 흘려 일했던 수많은 직장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고, 퇴근 후 졸린 눈을 비비며 밤을 새워 공부했던 날들의 흔적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붙잡아주었던 가장 소중한 이름들이 별처럼 새겨져 있었다. 네 세상의 전부인 ‘남편’과 사랑하는 ‘두 딸’이라는 이름이었다.


20년 만에 도착한, 가장 따뜻한 답장


그렇게 나만의 울퉁불퉁한 지도를 채워가며 정신없이 살아오던 어느 날이었다. 큰딸아이가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바로 그 대학교였다. 20년 전, 사촌 동생이 다니던 바로 그 학교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난 20년의 세월이 짧은 영화처럼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사촌 동생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던 스무 살의 나, 돈을 벌기 위해 꿈을 잠시 접어두어야 했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악착같이 버텨왔던 나의 모든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20년 전 길을 잃고 헤매던 스무 살의 내게, 사랑하는 딸이 보내온 가장 따뜻한 답장 같았다.


과거의 나와, 엄마와, 비로소 나누는 이야기


얼마 전 아산병원에 검진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막내 이모를 뵙게 되었다. 바로 그 사촌 동생의 엄마였다. 대구에 사시던 이모는 딸과 아들이 모두 서울에 자리를 잡자, 손주를 돌봐주기 위해 근처로 이사를 오셨다고 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이모의 세상은 여전히 자식과 손주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이모의 보살핌 속에서, 사촌 동생은 여전히 든든한 울타리 안에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모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셨지만, 우리 엄마는 소위 말하는 ‘억척스러운’ 분이 아니었다. 이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는 천성이 원래 그런 여린 사람이었다고.


그 순간, 나는 마음을 평생 짓누르던 하나의 응어리가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늘 엄마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썼지만, 어쩌면 나와 사촌 동생의 삶이 달랐던 진짜 이유는, 나와 이모의 성격이 아니라 우리 두 엄마의 타고난 성품이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억척스럽지 못했던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이모는 이모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식을 지켜낸 것이었다.


너의 지도는 틀리지 않았어


이제 나는, 과거의 스무 살의 나에게 다정하게 말해줄 수 있다. 괜찮다고. 너의 그 막막했던 백지 지도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고. 너는 너만의 방식으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길을 만들었고, 바로 그 길이 너의 딸을 더 새롭고 멋진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다고 말이다.


딸은 이제 그곳에서, 단지 안정된 미래가 아니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더 크고 단단한 꿈을 꾸고 있다. 나의 서툴고 울퉁불퉁했던 지도가, 이제는 사랑하는 딸의 더 넓은 세상을 위한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준 것이다. 이보다 더 가슴 벅찬 성공이 또 있을까. 나는 네 삶을 통해 그려낸 나만의 지도가, 이제는 자랑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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