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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누 Nov 15. 2023

장수생 일기 (2): 당기시오

19. 05. 21.

  시간 강사로 학교에 출근하고 일이 있어서 도서관에 박혀있는데, 학생 두 명이 왔다. 자기 주먹을 눌러보란다. 어 이거, 내가 학교 다닐 때 기억을 더듬어보면, 저 끝은 항상 손가락 욕이었는데.


  거부의사를 표시했더니 옆에 있던 친구가 주먹을 눌러준다. 바로 옆이 교무실인 걸 알고 여차하면 교무실에 함께 갈 양으로 경계를 하며 학생들을 지켜봤다. 손을 뒤집으란다. 그리고 손가락들을 당기란다.


  엄청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손바닥은 모두 펴졌고 그 안에는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인삿말로 안녕하세요, 뿐만 아니라 "사랑합니다"도 함께 쓴다. 그 덕에 학교에 있다보면 사랑 고백을 수십번은 받고 나도 수십번은 한다. 사춘기를 한창 겪고 있다보니 간혹 내 뜻에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이 있을 땐 속상하기도 하다. 그래도 인삿말로나마 몇번 사랑합니다, 하고 나면 결국은 이런 아이들이 좋아서 학교에서 일하려고 했음을 다시 깨닫는다.


  몇몇 아이들은 쭈뼛거리면서, 몇몇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아가 만들어지는 시기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임을 양껏 표현할 수 있다는 게 (형식적인 말을 통해서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끼리 싸우든, 선생님하고 갈등이 생기든, 부모님께 혼나든, 결국 부대끼고 산다는 게 사랑하고 있는 것의 한 모양임을 알았으면 한다. 그렇게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어른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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