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핸드폰에 관하여
기존 사용했던 핸드폰(이하 폰) 기종을 업그레이드했다. 용량이 작아 주기적으로 끊김 현상이 일었다. 글을 쓰는 용도로도 활용도가 높아 늘 장문의 글을 쓸 때 조마조마했었다. 기다리던 새 버전 기기가 9월 중순이 지나 출고되었고 두 번 고민 없이 신청했다. 며칠 후 아이와 함께 매장을 방문했다.
매장을 방문하기 전 남편에게 전화해 나직이 읊조렸다. "지금 쓰는 기계를 아이 이름으로 개통할까 봐." 현재 쓰고 있는 기기는 용량이 작은 것 말고는 불편한 점이 없어 뒀다가 아이가 조금 더 크면 계정을 만들어 쓰게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말마따나 '조금 더 크면'이었지 지금은 아니었기에 나의 말에 남편은 당황한 듯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주변에서 끊임없이 물어왔다. 초등학생이 되었는데 왜 폰을 안 해주냐고. 그런 입장을 표하는 사람 중 단연 남편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알아서 잘 사용할 텐데 유별나게 굴지 말고 폰을 개통해 주라던 남편에게 시종일관 내가 한 대답은 "사주는 순간, 모든 게 다 끝이야!"였다. 다소 극단적일 수 있으나 그보다 더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없을 만큼 적확한 사유였다. "폰을 사 주는 순간부터 대화 단절, 독서 중단, 비밀 증가, 스트레스 유발, 게임 및 유튜브 조절 불가!" 두 번 얘긴 입 아프다며 도리질 치던 내가 외려 아이에게 폰을 개통해 준다고 하니 남편이 놀랐을 만도 하다.
갑자기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아이를 믿어보라 말하는 남편에게 한 번 더 강조하길,
"개통은 하지만 소유는 아직, 책임감 있게 사용할 수 있는 교육을 시작하는 것뿐이니 당장 아이가 폰을 소유하거나 가지고 다닌다거나 앱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는 못해. 하나부터 열까지 찬찬히 알려준 후에 양도할 거고, 만약 제대로 배워내지 못한다면 그냥 없앨 거야."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니 전화 너머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젖는 남편의 모습이 비디오처럼 그려졌다. 튀어나오려는 말을 한껏 삼킨 남편은 잠깐의 정적 후 당신 알아서 하세요라며 존대를 가장한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내비쳤다.
남편도 저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았다. 폰이 없어 왕따가 된다부터, 아이들끼리 소통이 안된다, 아이도 기계를 잘 만질 줄 알아야 한다에서부터 너 때문에 애가 자존감이고 자신감이 떨어진다느니, 왜 그렇게 유별나냐느니, 남들 다하는 데 넌 뭔데 자꾸 그걸 거스르려고 하냐느니... 온갖 말을 들으면서도 꿋꿋했다. "폰을 주는 순간, 이전의 세계가 닫힌다고!"
아이가 태어나면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는 방식이나 방향, 아이의 기질이나 아이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이어가기 위한 무수한 노력들을 쏟는다. 그런 각자의 육아 철학은 어느 누구 하나의 방법이 맞다 틀리다가 아닌 고유의 가치관이다. 수많은 우여곡절 또는 시행착오 끝에 엄마들이 발견하고 만들어낸 결정체이며 만들어졌다 해서 끝이 아닌 하나의 활로를 확보한 것에 대한 환희고 감사다. 그런 환희와 감사가 켜켜이 쌓인 육아는 단순히 '키워내고', '길러내는'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생의 어느 지점까지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보고 아이를 단순히 나의 사람이 아닌 온전히 하나의 존재로 인지하게 된다. 그런 알아차림으로 말미암아 아이와 본인 앞에 펼쳐진 깊고 깊은 해저를, 높고 높은 우주를, 넓고 넓은 세계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아이를 둘러싼 앞으로의 세계를 그려보는 엄마는 아이에게 폰을 건네는 순간조차도 그것에서 파생될 무수한 것들을 꼼꼼히 살피게 된다. 폰, 그러니까 가상의 세계는 아이가 이전까지 마주했던 세계와는 너무나도 다른 세계이고 그 세계는 아이 스스로가 아닌 부모 또는 주변,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 준 세계이기에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른들도 사회도 다 알지 못하는, 그래서 신비롭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한 그 세계는 어른들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편리한 것만 따지면 가장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것 같지만 그런 당위 뒤에 숨어 있는 결코 사소하지 않는 폐단을 매 순간 알아차려야 한다. 세계 속 모든 지구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지만 모든 지구인들이 다 좋은 사람일 리 만무하고, 간단한 조작으로 문 앞에 음식을 가져다 둘 수 있지만 기후 위기는 앞당겨지고 라이더 노동자의 권리는 쉽게 폄하된다. 한 달 7,890원만 주면 일어나기도 전 물건이 도착하지만 배송 노동자의 일터에서는 매해 노동자들이 죽어 나간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인이 아동을 강간하는 영상을 진위 여부도 모른 체(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체) 사춘기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는 야동으로 인식되고 있고, sns에서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자살을 하고, 2분짜리 숏폼은 1년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온갖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해 사람들의 집중력과 판단력을 서서히 말소시킨다.
단순히 '연락'을 위한 용도로 아이들에게 폰을 건네지만 정작 전화를 걸면 아이들은 받지 않고, 엄마의 폰 번호를 지우고는 '모르는 번호라 안 받았다'라며 부재의 이유를 밝히는 아이들은 전혀 거리낄 게 없다. 하루 몇 번의 연락을 빌미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에게 마치 당연히 사줘야 한다는 듯 폰을 사주며 아이가 앱을 사용하는 시간이나 설치 유무를 나의 허락하에 하고 있다며, 하루 정해진 시간을 따 쓰면 데이터가 잠기며 아이는 더 이상 할 수 없다며, 나 정도면 미디어 조절 잘 하고 있는 거라며 큰소리치지만 글쎄다. 정말 속까지 다 들여다보았을 때도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을지.
아이와 번호를 정할 때부터 상의가 시작한다. 뒷번호는 설정할 수 있지만 중간 번호를 주어지는 번호를 택해야 하기에 번호가 쉬울수록 좋다고 판단했고(누르기 쉬운 번호), 무엇보다 이전에 개통된 적이 없는 번호여야 했다. 다행히 아이의 뒷번호에는 사용한 적 없는 번호가 많았고, 패턴으로 눌렀을 때 쉬운 번호로 선택했다. 초기화된 폰이 아이 계정으로 개통될 때 이미 나의 유저, 그러니까 미성년인 아이가 계정을 만들 때 이미 부모인 내가 모든 걸 관여하는 시스템이었다. 그 흔한 네이버 앱도 깔지 않았고, 유튜브를 비롯 어떠한 앱도 추가하지 않은 날 것의 폰을 건네며 아이에게 말했다.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생각해 보렴."
폰이 생겼다고 당연히 번호를 알려주는 것이 아닌, 그것을 알려준다는 건 너에게 언제든 전화를 해도 괜찮을 사람인지를 생각해 봐야 하며, 알려 준 후에는 그 사람과 소통이 되는 과정을 당연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연락하기가 꺼려지는 사람에게는 번호를 알려줄 필요가 없으며 모든 전화를 일일이 다 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 그대로 '전화'기능부터 하나하나 알려줬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사촌들에게 연락처를 주고 싶다던 아이에게 문자를 쓰는 방법부터 가르쳤다. 용건을 포함한 간결한 내용으로 전송할 것, 바로 답이 오지 않는다 해서 불쾌해 할 것 없고, 정말 중요한 내용은 전화를 걸어 이야기하라는 것 등 문자 메시지에 글을 쓰는 방법까지 친절히 이야기해줬다.
이런 것까지 다 관여하는 엄마, 그래 피곤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한두 번, 처음 한두 달만 번거롭더라도 제대로 알려주면 앞으로 아이가 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또 폰 예절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본적인 기능들을 하나하나 다 눌러본다. 나침반을 비롯, 지도, 번역기까지 다양한 폰 본연의 기능들을 들여다보는 것만도 아이에게 너무나도 흥미로운 일이다. 실제 아이가 가장 빈번하게 쓰는 기능도 지도와 나침반이고 이따금 메모장을 열어 순간순간을 기록하기도 한다. 당장 유용한 앱이 없어도 자신에게 필요한 기능들을 잘 사용할 수 있다. 폰을 소유(소지) 하지 못하기 때문에 2,380원짜리 거치대를 사 거실 티브이 앞에 지정 자리를 만들었다. 오래전 집 전화의 형태를 생각하면 된다. 전화를 걸거나 받기 위해선 그 자리로 가고 용건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에 둔다.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으니 매 순간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배터리가 많이 소모되지도 않는다. 일주일, 아이는 자신의 폰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혹여 왔을지 모를 연락을 확인해야 한다고 몇 번 일렀는데도 신경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연락의 용도로도 기능하려면 그것을 확인하고 연락을 해주는 것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한다. 부재 전화의 사유와 용건을 묻기 위해 다시 전화를 걸어보고 집으로 오면 무음이었던 알람을 벨 소리로 바꾼다. 무음과 벨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친다. 상황마다 벨 소리가 갖는 의미, 또 그것을 조절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까지, 번거롭고 귀찮더라도 친절히 말해준다. 그렇다. 한 번 말한다고 다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은 들을 때는 다 알아듣는 것 같다가도 막상 돌아서면 까먹는 게 아이들이다. 잔소리처럼 나직이 읊조리며 아이에게 폰을 소유한다는 건 이렇게 무수한 책임이 따른다는 걸 넌지시 인지시킨다.
주중 아이와 5일간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아빠와 조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한 용도로 폰을 챙겼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는 것까지 자유롭게 하라 일렀고, 실제 아이는 멋진 풍경을 담아 어른들께 전송했다. 용건이 있을 때만 만지고는 용건이 끝나면 바로 자리에 내려놓고는 곧잘 잊곤 했다. 대부분 차에 그냥 두고 내렸고 다시 차에 올랐을 때 그것을 확인했으며 벨 소리가 나도 자신의 폰인지 인지하지 못해 일일이 "네 전화야"라고 말해주었다.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그때그때 메모장에 자신의 체험이나 감정을 글로 옮겼다. 기록용으로 메모장을 십분 활용했고 사진을 편집해 전송하기를 즐겨 했다. 단순하게 사용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폰의 기본적인 기능들을 충분히 알려주고 앱을 깔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최근 'ebs 초등' 앱 설치를 고려 중이다. 즐겨보는 역사 수업과 영상을 보기 위함인데 앱을 설치하는 것부터 그것의 장단점, 데이터 소모까지 또 알려줄 것이 한 그득이다.
2주가 지나 느낀 점은, 아이들에게 앱을 제공하지 않았을 때 과몰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조금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과 '믿고 맡긴다'의 의미는 지나온 무수한 시간 속에서 쌓고 쌓은 서로의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잘 사용하리라 믿어"는 이때까지의 면면에서 아이가 책임감 있게 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정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그럼에도 언제든 미디어의 폐해를 맛볼 수 있다는 다층적 인지가 장착되어야 한다. 내 아이만 다를 리 없다. 내 아이도 언제든 이상 증세와 높아지는 우울증 및 자살률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건강하게 사용하는 방법과 그것에서 언제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조절력을 길러주는 것이 현재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범람하는 미디어의 폐해 속에서 나의 아이를 지켜내는 유원하지만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