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좋은 환경에 관하여
아이가 너무 자극적인 책만 읽어요. 순한 맛 동화, 아름다운 이야기의 책들을 읽힐 방법은 없을까요? 아니, 아이한테 그 책을 읽어주신다고요? 그건 좀 잔인하지 않나요? 그러다 아이가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면 어떡해요?
직업상 많은 어머님들을 만난다. 육아를 기본에 두고 아이의 독서나 글쓰기에 대해 강의를 한다. 강의 자료를 살뜰히 준비하고 실생활에서 아이와 내가 겪은 경험을 적절히 섞어 두어 시간 열심히 강연을 하고 나면 한두 분, 내가 하는 말들에 놀라움을 표하신다. 얼마 전 “그 책을 같이 읽는다고요?” (여기서 그 책은 ‘아몬드’였다) 눈이 정말이지 동그래진 참여자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문득, 우린 왜, 엄마들은 왜 좋은 것만 주려고 하는가!에 의문이 들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좋은 것과 아닌 것을 한번 구별해 보자. 예를 들어, 엄마 스스로 선택한 비건을 균형 잡힌 식단이 필수인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없는 아이에게 강요하는 건 좋은 건가? 북유럽 아이들의 양육방식을 들여다보고는 추위와 면역력의 관계를 운운하며 한 겨울 아이를 유아차에 태워 부러 밖으로 나가 낮잠을 재우는 건 좋은 건가? 시청연령을 사수하며 나름대로 건강한 콘텐츠만 노출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자신은 친구와 전화 통화로 주변인을 험담하는 대화를 아이에게 그대로 흘려보내는 건 좋은 건가?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육아는 정답이 없다. 100명의 아이가 있다면 100개의 육아법이 있을 뿐이다. 각자의 육아 방식을 십분 존중한다. 다만, 자신의 육아에서만이라도 옳고 그름은 명확히 알고 갈 필요가 있다. 옆집 여자의 육아를 운운할 것 없다. 옆집 아이와 내 아이가 다른데 다른 아이를 다르게 키우는 것이 무엇 문제인가 말인가. 중요한 건 ‘잘’ 키우는 것보다 ‘적절하게’ 키우는 것이 결국 부모로서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육아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에게 내가 주는 것들 이를테면 환경이라든가, 애정이라든가, 관심이라든가 따위의 것들이 무조건 ‘좋아야’ 하는 걸까?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는 청소년 문학으로 출간되었지만 다양한 연령층에서 누구에게나 공감될 수작 중 수작이다. 판매고나 작가의 이력을 차치하고 작품 자체만으로도 지니는 함의가 크고, 어떤 대상과 이야기를 나눠도 가볍지 않은 사유를 나눌 수 있다. 또 현실에서의 많은 지점들이 연결되어 앞으로도 끊임없이 읽히고 또 읽힐 문학작품이다. 아홉 살 아이와 이 책을 함께 읽었다. 대충의 줄거리만 이야기해 주었는데 아이의 흥미를 사로잡았다. 작품 속 윤재의 마음을 따라가는 전개가 퍽 재미있었고, 실제 윤재가 치유되어가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며 한 사람이 재생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책 내용 중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신체의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아이에게 삶이 녹록 할리 만무하겠지만 더욱이 잔인했던 건 사랑하는 가족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극 중 가장 충격적이기도, 또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에게 이 사건은 비단 가족의 죽음을 넘어 우리 사회의 면면을 고스란히 안겨준 장면이기도 했다. 누구 하나 도움을 주지 않았고, 실제 범인에게 동정론이 일면서 그 일이 마치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철저하게 가해자의 시선으로 정리되고 또 잊혀 간다. 이 장면이 아홉 살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은 좋은 것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 벌써부터 그것들을 알 필요도 없다.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배우는 것들은 한 사람이 아이를 앞에 앉혀 놓고 가르치는 일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들일 수 있다. 중요한 것들,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은 단순히 암기하는 것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생각을 끌어내고 끌어내는 동안 아이가 경험하는, 소소하지만 결코 소소하지만은 않은 시간들 속에서 아이는 세상을 배운다.
인생을 하나의 티브이 프로그램으로만 편성할 수는 없다. 이 프로그램 시청연령은 9세까지, 12세까지, 19세까지. 그렇게 딱딱 나누어 선택적으로 살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이의 정신연령과 사고 수준을 온전히 파악하고 그것에 적절한 노출은 각 잡고 앉아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과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래서 아홉 살 아이에게 묻지 마 살인을 보여주라고요? 아니다. 인생의 수많은 장면들과 감정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이를 꽃밭에만 두지 말고 넝쿨 숲에도 들어가 보게 하고, 무더운 온실 속에서도 서 있어보게 하고, 쉼 없이 바람이 몰아치는 들판 한가운데에도 세워보라는 말이다. 그것에 ‘적절한’ 보호자가 되어 함께 서서 그것들을 맞이해보라는 말이다.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게 사랑이라는 생각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시커먼 그림자 같은 통제와 감시를 전제로 한다. 세상에서 좋은 걸 아이가 아닌 부모가 선을 그어 확정 지어 놓는다는 것부터가 이미 폭력적이다. 가을인데도 여름 소나기처럼 퍼붓는 비에 아이에게 말했다. “이따 엄마가 데려다줄까? 비가 많이 오는데 가는 동안 옷이 다 젖겠다.” 1초의 고민 없이 아이는 대답한다. “아니, 이런 날씨는 학교 가는 길이 재밌어. 너~무 시원하다고!”
아이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되는가? 하루 종일 젖은 옷과 양말을 신고 있으면 찝찝하진 않을까 걱정되는가? 이 비 속에 걸어가는 아이가 나의 아이 하나뿐일까 불안한가?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을 먹이고 뜨끈한 국을 끓여 먹이면 되고, 여벌옷과 포슬포슬한 양말 한 켤레는 가방에 넣어주면 될 일이다. 나의 아이 혼자만 걸어간다면 그런 네가 멋지다며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세워주면 될 일이다.
아이에게 좋은 건,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