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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대장 Oct 16. 2024

나의 한강

아이의 글쓰기에 관하여


나의 아이는 글을 잘 쓴다. 아이들과 함께 글을 쓰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이들의 글이 잘 쓴 글과 아닌 글로 나뉘는 건 순전히 지도사의 취향이고, 특히나 저학년 친구들의 글쓰기는 잘 쓴다와 못쓴다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래서 어떤 날은 재미있는 글이, 또 어떤 날은 무성의한 글이, 또 다른 어떤 날은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나온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섬처럼 동그마니 앉은 나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신경이 뺏겨  자신에게까지 엄마의 시선과 눈빛이 닿지 않음에도 한결같이 일정한 패턴과 문장으로 글을 써내린다.


사실 누구도 나의 시선이 필요해 글을 쓰는 아이는 없다. 다만, 오늘 발표의 주인공이 내가 (먼저) 될까 아닐까에, 또는 랜덤으로 정해지는 주제가 그나마 내가 쓰고 싶어 하는 주제로 골라지는 것에, 또 어서 끝내놓고 잠시라도 여기 있는 친구들과 곰인형을 던져가며 야구 놀이, 축구 놀이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정신이 팔려 있을 뿐이다.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친구도 있고, 시간아 어서 가라 그저 빈칸을 채우기에 급급한 친구도 있다. 손으로 쓰는 글씨가 입으로 내뱉는 말을 따라가지 못해 쓸 글의 보자기를 한 보따리 안아 들고 있으면서도 입구 주둥이만 벌려 놓고는' 아이고 팔이야' 하는 친구도 있다.


생각한 것을 글로 옮기는 일은 사실 꽤 복잡한 일이다. 상상한 것을 구현해 내는 것만큼이나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일. 당일 주제를 받아서 여러 형식에 따라 글을 쓰는 일은 어른들도, 그것도 글을 좀 쓴다 하는 어른들에게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일이다. 그래서 잘 쓰는 것보다 성실하게 쓰는 것을 가장 유의미하게 내세우며 아이들에게 수시로 그것을 설명한다.


주저하지 마, 일단 써, 수정은 나중에, 머릿속에 둥실 떠 있는 단어들과 생각들을 놓치지 말고 잡아채서 종이에 옮겨 적어!


일정 수준의 과정을 거쳐 한편의 글이 완성되는 데에는 사실 내가 해주는 건 미비하다. 주제를 떠올리고 떠오른 생각을 옮기기 위한 단어를 선택하는 작업이나, 타이핑이 아닌 손글씨로 종이에 옮겨 적는 일은 아이들 본인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다. 시간을 두고 생각을 정리해 일목요연하게 쓰면 더없이 좋겠다만 아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백일장도 아닌데 즉석 주제라니. 손글씨로 글을 쓰는 일만 해도 무척이나 수고로운 일, 결코 그 1시간 내외의 글쓰기 작업이 만만할 리 없다.


하지만 모든 친구들이 그 시간을 만만치 않게 생각하는 건 또 아니다. 열에 아홉 번을 쓰는 작업에 매진하다가도 어떤 날은 하릴없이 지우개를 비벼 정성스레 지우개 똥을 만드느라 할당된 시간의 대부분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아! 진짜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만 수십 번 반복하다 두어 줄 써 놓고는 "더 이상 못하겠어요!" 스스로 GG를 선언하기도 한다. 그런 친구들이 다반인 그곳에서 유일하게 나의 아이는 어떤 순간 속에서도 "못쓰겠어요!"를 내뱉은 적이 없다. 그것은 글을 잘 쓰는 것과 또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나에게 정리된다. 그것을 간단하게 하나의 문구로 정리하라고 하면 바로 '성실함'이다. 어떤 주제를 주어도 아이는 늘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날의 주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아이들 사이로 꾹 다문 입술을 연필 끝으로 지그시 누르며 하나의 생각에 골몰하는 아이가 보인다.


그런 아이를 모른척하는 건 외면이나 젖혀놓음이 아닌 일종의 믿음이다. 다른 아이들을 둘러 보고 챙기느라 아이가 뒷전이어서 미안한 건 초반이었다. 필사를 시작으로 2년째 아이들과 읽고 쓰는 일을 이어가는 동안 매 순간 속에 나의 아이가 자리하고 있음에도 변변찮게 챙겨 돌보지 않았다. 내 아이에게로 향하는 애정과 관심에 혹여 다른 아이들이 질시나 차별을 느낄까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못내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하는 아이는 일면 그것에서의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시간들을 거쳐오면서 아이는 아이대로 선생님인 엄마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고 그 방법은 바로 저 태도와 자세였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선생님인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당일 글쓰기 미션에 대해 거침없는 질문을 토해낼 때 아이는 그것에서 엄마가 느낄 피로함을 미리 알아차리는 것일 테고, 알아차리는 것만이 아닌 자신의 몫을 누그려 뜨려 엄마가 몰아쉬는 가쁜 숨을 조금은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리라.  또 엄마가 늘 강조하는 닥치고 써! 마인드가 자연스럽게 탑재된 아이가 지금 쏟아내는 아이들의 질문이 무용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는 것이다.   


그냥 쓰라고! 질문은 이제 그만하고 그냥 쓰라고!


아이는 아이대로 나의 수업 방식을 저대로 존중해 주고 있었다. 단순히 엄마라는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수업을 통해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의미 있게 수행하려는 아이의 계산이고 어떻게로든 썼을 때 자신의 눈앞에 남겨진 활자들을 바라보는 쾌감과 뿌듯함을 느낄 줄 아는 아이의 시선 덕분이다.


골몰하던 아이가 최대한 생각을 끌어낸 후부터는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는 손목을 놀린다. 흡사, 오락기 스틱과 버튼을 미친 듯이 휘갈겨야 나의 선수가 앞으로 나아가 결승선에 가장 먼저 들어올 수 있었던 오래전 오락실 올림픽 게임처럼 쉬지 않고 써내리는 아이의 손엔 나와는 다르게 연필이 쥐여 있을 뿐이다. 쉬지 않고 뜸 들이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글자를 써내린다. 손가락, 손목, 팔 어디께 가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거늘 써야 할 말들이 흔들어 터뜨린 샴페인 거품처럼 계속해서 밀려 올라오니 쏟아내지 않고서는 못 베긴다. 그것이 잘 표현된 글인지, 재미있는 내용인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적절한지 따위는 전연 상관없다. 엄마가 선생님이기 전부터 줄 곳 강조했던 게 바로 닥치고 그냥 써! 였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가 한 장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오늘 써야 할 글을 쓴 데에 온 에너지를 쏟아내고 그저 마치는 시간을 기다리거나(글도 다 안 썼는데 시간이 다 되었다고 가야 된다며 문 앞에 서 있는 아이도 있다) 나의 글을 발표할 순간만을 기다리지만(순서가 정해질 때 예민해진다 이런 친구들은) 나의 아이는 부산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쓴 글을 계속해서 읽는다. 읽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보태어 쓰기도 하고, 뒤늦게 어색한 부분은 지우개로 지우며 자신의 글이 조금 더 ‘작품’이 될 수 있게 저대로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아이가 글을 잘 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이유이다. 자신의 글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결코 잘 쓴 글이 아니어도 괜찮다. 선생님의 칭찬이 없어도 되고, 아이들에게 발표할 때 아무도 안 웃어도 된다. 내가 쓴 글은 지금 방금 생각한 것이 아닌 언제고부터 내 안에서 혹은 책 속에서 또는 엄마나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던 일들을 글로 말할 수 있게 된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무척 신나고 즐겁다. 그것이 아이의 글에서 내가 발견하게 되는 나의 아이만의 소중한 글이다.


아이의 마음 안에 무수한 이야기가 줄줄 흐른다. 강물처럼, 별빛처럼 쉼 없이 흐르는 이야기는 활자가 아닌 말이나 행위로도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 그것들을 결코 소소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선과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 붙이고 새로 만들어 가는 아이는 성실한 글쓰기로 오늘도 내 옆에 앉아 글을 쓴다. 지구인과 태양인이라나. 반대급 행성에 사는 두 우주인이 서로의 다름을 알아차리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시놉부터 이미 아이는 머릿속이 그득 차있다. 그것을 활자로 쏟아내느냐 아니냐는 아이의 의지다. 머릿속을 맴돌다 사라지는 이야기는 혼자만 즐겁지만 활자로 쏟아낸 이야기는 모두가 즐거울 수 있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모두를 즐겁게 해야 할 사명감은 아니지만 너의 주변이 즐거우면 네가 즐겁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네가 하는 일들이, 하려는 일들이 절대로 하찮고 유치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아이에게 늘 이야기해준다. 며칠 전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더듬으니 마음속 사막 한가운데, 흩날린 모래 아래 자그마한 글자가 보였다. 소설.


아주 오래전 꿈이 소설가(작가가 아니고요. 소설가였어요. 줄 곳)라고 이야길 하면 열에 아홉은 똑같은 대답을 했다. "소설? 넌 돈 벌기는 글렀구나!" 실제 대학 전공도 문창과가 아닌 문정과였던 건 소설이 좋아 소설을 쓰려던 내가 소설을 써서는 밥을 벌어먹을 수 없을 것 같아 소설이 그득 쌓인 도서관에서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소설 실컷 봐야지 하는 심산이었다. 그때 문창과 문정을 갈랐던 건 현실적인 문제였고,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난 바보였고 겁쟁이였지만 이제는 나의 아이에게도 큰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는 나의 한강이야. 네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네가 할 수 있는 (하려는) 일들이 결코 의미 없지 않단다. 너만의 한강에서 마음껏 쓰고 마음껏 읽으렴"


나의 아이가 글을 쓰겠다고 한 건 아니다. 13살 때부터 소설을 쓰겠다던 나조차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설의 ㅅ자도 못 쓰고 있기 때문에 원한다고 써지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쓰려는 글이, 하려는 일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으로 나아가는 너의 정성과 성실함이 언제고 너의 삶에 또 다른 한강으로 다가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확신을 아이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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