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등산을 시작한 계기는 딱 하나였다. 완벽한 그녀에 대한 동경.
유치원은 교육과정과 방과후과정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방과후과정을 담당하여 나와 한 반을 운영하는 짝꿍이 될 선생님이 어떤 분이실까, 기대와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 미리 어떤 분인지 짐작이라도 하고 싶어 원감선생님께 번호를 받았다. 전화번호를 저장하니 눈 덮인 하얀 산에 파란 패딩을 입고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 떴다. 눈이 많이 내렸는지 그녀의 긴 속눈썹에 하얀 눈이 맺혀있었고, 몹시 추워 보였다. 방한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눈 밖에 안보였지만 정말 행복해 보였다. 신기했다. ‘에너지가 넘치는 선생님이신가 보다.’, ‘눈 밖에 안 보이지만 예쁘실 것 같다.’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학기가 시작되는 날, 드디어 내 짝꿍 선생님을 만났다. 조막만 한 얼굴에 큰 눈, 긴 속눈썹, 오똑한 코, 길쭉한 팔다리. 예쁘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상도 너무 좋아서 안심이 됐다. 얼른 친해지고 싶었다. 신이 있다면 이건 너무 불공평한 설계가 아닌가 싶게 그녀는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았다. 내가 교육과정 운영을 마치고 교실 밖에 나와서 그녀가 교실에서 아이들과 있는 모습을 보면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이들과 옆에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도 주고받고, 장난도 치는 모습은 내가 가지지 못한, 내가 동경하는 교사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가 교실을 꾸미고 있으면 퇴근 시간을 넘겨가면서도 내가 올라선 책상을 잡아주었다. 내가 무언가를 붙이고 있으면 옆에서 테이프를 떼어주고, 가위를 넘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담을 앞두고 방과후과정 관찰 기록을 연계받았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선생님은 다각도로 아이들의 학습면, 생활면을 파악하고 있었고 세심하게 그것들을 모두 기록했다. 정말 감탄을 넘어 감동적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나보다 적은데 나보다 많은 역량을 가진 그녀였다. 정말 모든 것을 다 가진듯한 그녀가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한 학급을 운영하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이야기를 방과후선생님과는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어 좋다. 힘든 일도, 기쁜 일도, 속상한 일도, 웃긴 일도 척하면 척!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니 정말 많이 의지가 된다. 그래서 그녀와 저녁 약속을 잡아서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도 참 즐거웠다. 그때 나는 그녀의 취미 생활에 대해 물어볼 용기를 내었다.
“쌤 프로필 사진에서 봤어요. 쌤 등산 좋아해요?”
나는 평소에 벌레도 싫어하고, 체력도 좋지 않은 편(아주 안 좋은 편)이라 등산을 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등산 싫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폭풍 질문 세례를 쏟아부었다. “쌤, 등산 안 힘들어요? 쌤 체력 좋아요? 벌레 많지 않아요? 벌레 안 싫어해요? 여름엔 너무 덥지 않아요? 겨울엔 너무 춥지 않아요? 등산 왜 시작하게 된 거예요? 가봤던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그녀는 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을 해주었다. 그녀도 체력이 안 좋았을 적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등산을 시작했다고 했다. 벌레를 여전히 싫어한다고 했다. 겨울엔 너무 춥기도 하지만 너무 덥기도 해서 반팔부터 패딩까지 여러 겹을 껴입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가봤던 곳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멋진 사진 때문일까, 멋진 그녀에 대한 존경심 때문일까, 등산이라는 것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벌레를 싫어해도, 체력이 좋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일할 때 보여주었던 의연한 모습도 생각이 났다. 나는 일하면서 어떤 사건이 생길 때마다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그래서 다음날 교실에 들어올 때 몹시도 두렵고 짜증이 나고 무기력하다. 그런데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을 법한 일이 있더라도 그 다음날 의연하고 태연하게 교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평소같이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단단한 내면을 가진듯한 그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등산을 하면 선생님처럼 의연해질 수 있으려나? 이런 감정적인 것들에 흔들릴 수 있지 않으려나? 등산을 하면 체력이 좋아지고, 체력이 좋아지면 마음도 강인해질 테니 나도 등산을 해볼까?’ 그리고 그날 집에 와서 공언을 했다. “나도 이제 등산할 거야!”
나는 아직도 산행 시간이 남들보다 1~2시간은 더 걸리는 왕초보 산악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들로도 그때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맞다. 퇴근 후의 일상에 기대되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으로 적당히 힘도 들고 바쁘기도 하며 성취감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직장에서의 일에 목숨 걸지 않게 된다. 직장에서의 평판, 직장에서의 성취가 곧 나 자신의 가치로 귀결되던 사고를 끊어낼 수 있다. 그렇게 더 의연하고 담대한 마음을 키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