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게
토요일부터 오르던 열이 밤새도록 떨어질 줄을 모른다. 사람의 체온이 이토록 오래 팔팔 끓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데, 정작 그 열과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은 얼마나 괴로울까. 어젯밤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주고 얼음주머니를 옆구리에 끼워 열을 내리느라 나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남편의 발치 아래 놓인 침대에 엎드리거나 간이침대에서 눈을 붙여가며, 깜빡 졸았다 깨어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당신의 신음소리는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병사(病死)의 문턱에 선 당신은 지금 온몸으로 생존을 알리고 있다. 그 신호들은 마치 마지막 불꽃처럼 고통의 형태로 터져나온다. 그 고통이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인지, 아니면 아직 남아 있는 생의 힘이 저항하는 방식인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죽음의 세계’가 이토록 몸을 으스러뜨리는 고통을 수반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삶과 죽음은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차원의 질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는 것이 그렇다. 죽기 위해 사는 것도, 살기 위해 죽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어진 목숨이 허락하는 만큼 숨을 쉬며 살아가고, 그 숨이 다하면 조용히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대단한 뜻이 있다고 믿었던 인생도, 사실은 이 단순한 순환 앞에서 겸허해진다. 살아지고, 살아가고, 결국 사라진다. 그 과정이 삶이라는 긴 호흡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낙담하며 실의에 빠져 있지 말자.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내 남편’이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저 세상을 준비하는 사람, 이곳의 삶을 벗어나 저편으로 건너갈 사람이다. 이미 인간의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음을 인정하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당신의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적막한 병실에서 고요히 안녕하기를 빌어주는 일뿐이다. 당신이 어느 날 훌쩍 저 세상으로 건너가더라도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그 담담함이 당신의 마지막 시간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내 자신을 지키는 최소한의 숨결일 테니까.
(당신이 떠나기 2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