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이 Jan 13. 2024

사랑해를 읽어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누군가 나에게 언제 처음 책을 읽었는지, 몇 살 때 본 책이 기억나는지, 기억 속 처음 그림책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자신이 없다. 단순 기억력은 좋다고 자부하는데 유독 어린 시절은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마치 일부러 지운 것처럼 어린 시절의 내가 흐릿하게 보인다. 어릴 때 기억이 희미한 내가 어떤 그림책을 읽었는지 기억날 리가 없다. 지우개로 대충 지워서 띄엄띄엄 남아있는 글자 정도로 생각이 날 뿐인데 그중에서도 선명한 부분은 있다. 


아빠 손을 잡고 서점에 가서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모습은 또렷하게 보인다. 당시 서점의 냄새까지 나는 듯하다. 책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서점 나들이도 좋아하셨다. 당시에는 주말이면 서점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서점에 가서 고르는 책은 꼭 사주셨기에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나 보다. 책을 사고 서점 내 식당에서 먹었던 김밥과 유부초밥의 맛도 기억난다. 아버지가 아직 내 옆에 계신다면 물어보고 싶다. 


"아빠도 그때 그 김밥 맛있었어요?"


여행에 대해 좋은 기억만 있는 나는 '여행'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무언가를 떠올렸을 때 좋은 기억이 있다는 건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된다. 기분이 안 좋을 때 무조건 기분을 좋게 만드는 방법이 생기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고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도 그렇다. 책을 생각했을 때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지는 나처럼, 아이들도 '책'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간직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밥을 먹고 구입한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잡았던 아버지 손의 온기처럼, 잠에 드는 순간 들리는 엄마의 책 읽는 목소리처럼. 책의 기억이 마음이 아플 때 꺼내 먹을 수 있는 비상약처럼 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도 힘들 때면 책 읽는 시간을 갖는다. 마음이 아플 때 책에 눕는다. 사람과의 관계에 지쳤을 때는 에세이를 읽고 혼자만의 자유 시간이 생기면 소설책을 읽는다. 육아가 어렵고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려울 땐 육아서를 찾아본다. 우리 아이들도 일상에 멈춤이 생겼을 때 누를 수 있는 재생 버튼이 책이면 좋겠다. 책펼쳐서 글을 읽고 그림을 보며 다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이가 맛본 엄마의 사랑


첫 임신을 하고 아이를 만날 준비를 하면서 '책'도 준비했던 나는 사실 신생아와 책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책을 읽어줘야 하는지, 무슨 책이 좋은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런 책이란 건 없지 않을까. 그때까지 그림책은 잘 몰랐던 엄마가 된 나는 스테디셀러에서 책 한 권을 골랐다. 아이와 매일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현실에서는 신생아 전투 육아에 정신을 못 차렸고 책 읽기의 순서는 뒤로 밀려갔다. 기적과 기절을 오가며 엄마가 되어가던 중 웃고 있는 아기가 보였다. 


바로 내가 준비했던 책의 표지에 그려진 웃고 있는 아기다. 나의 아이에게 그 책을 읽어줌과 동시에 아이는 나의 설렘을 먹어버렸다. 초보 엄마가 구강기 아이에게 얇은 종이책을 주었기 때문이다. 책을 맛보고 손으로 뜯어보던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첫째의 침 냄새를 간직하게 된 책.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씹고 뜯고 맛보았던 아이는 점차 손으로 책을 만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책장을 넘기는 일은 무려 몇 단계를 거쳐야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육아는 늘 뒤늦은 깨달음처럼 느껴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엄마도 아이와 함께 성장할 기회가 생긴다. 


처음 엄마가 된 내가 처음 선택한 그림책의 제목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우리 집에서 엄마와 아이가 처음으로 같이 읽은 그림책이다. 책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우리 아가 __에게"로 시작한다. 책을 읽는 동안 14번 사랑한다고 말하게 된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이가 무슨 얼굴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책. 엄마는 늘, 언제나,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책이다.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 '사랑해'라는 말은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아이를 향한 마음을 '사랑해'라는 단어가 있어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 육아가 힘들어도 "사랑해"라고 말하면 사랑만 전해질 거라 믿었다.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는 엄마의 사랑만 기억해 주길 바랐다. 엄마의 사랑을 듣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날 나에게 사랑을 말해주었다. 아이가 처음 "사랑해"라고 말했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나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ㅅㅏㄹㅏㅇㅐㅎ


첫 아이가 자라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책 여행과 함께 '사랑해' 마법 주문도 쌓이기 시작했다. 엄마의 '사랑'을 듣고 자란 아이가 처음으로 쓴 글자는 가족 이름이었고, 두 번째는 '사랑해'였다. 나의 아이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게 된 순간이란, 생각 이상이다. 어린이집을 다녀온 아이가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냈고 이면지 뒤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사랑 ㅐㅎ. 


사랑을 처음 쓴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지. 그 후로도 사랑 고백 편지는 계속되었고 요즘은 둘째가 귓속말로 사랑을 표현한다. "엄마 사랑해" 


아마 사람마다 삶의 마법주문이 다 다를 것이다. 마음을 소리 내 말하는 순간 나의 마음에 힘을 주는 마법 주문과도 같은 말들. 그 순간이 쌓이면 진짜 내 삶에 마법 같은 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사랑해"


매일매일 아이의 이름을 넣어 그림책을 읽었다. 어느 날, 딸이 나의 이름을 넣어 책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읽어보았다. 처음에는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것도 낯설고 오글거렸다. 사랑해, 사랑해-. 책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웃음이 나오다가 생각에 잠겼다가 눈물이 고이는 날도 있었다. 우리 아이도 세상에 하나뿐이지만, 나도 세상에 하나뿐인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 존재했던 사실이지만 지워졌던 것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말썽을 부릴 때나 심술을 부릴 때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책을 읽으며 나는 '나'를 언제 사랑하는지 돌아보았다. 마음이 아플 때 나를 탓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나를 미워했는데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이 내가 되고 싶었다.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이에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읽어주며 나에게도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기억 속 처음 그림책은 모르지만, 내가 나에게 읽어준 처음 그림책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을 말하는 그림책을 보며 나는 사랑을 읽었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는 책. 그림책을 핑계 삼아 사랑을 고백해 보면 어떨까. 사람은 존재 자체로 사랑이고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한다. 존재 자체로의 사랑을 말하게 하는 그림책을 보며 나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너희들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을 읽으며, 사랑을 말하며 나를 만났다. 존재 자체로의 사랑을 잊지 말라고 말을 걸었다. 나도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를 사랑하고 다른 존재의 사랑도 존중하는 사람이고 싶다. 

이전 01화 함께 읽어요 그림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