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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터플랜트 Jul 04. 2024

희망에도 지지대가 필요하다



지난겨울의 일이었다.


내게 닥친 고난이 형체조차 뭉뚱그려진 채 시간만 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모양이 다른 시련이 존재했다. 친구는 본인이 가진 시련이 얼마나 고단한가를 구구절절 토로하는 대신 철학관의 전화번호를 넘겨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내가 자주 찾아가는 곳이야. 너무 답답하면 한번 가봐. 나는 잘 맞는 것 같던데 다른 사람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근데 멀어.”

덤덤하고 평온한 목소리였다. 친구는 세상사에 무던하고 다정하며 귀여운 사람이었다. 애초에 귀찮아서라도 분란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친구의 주변이 얼마나 소란스러웠기에 단골의 철학관이 있다는 걸까 싶어졌다.

“뭐야, 진짜 멀어.”

경기도에 사는 친구가 가기에도 거리가 있는 곳이니 서울 끝에서 출발하려면 두 시간은 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혹했다. 오히려 저 불편을 감수할 만큼 잘 맞춘단 말인가 싶어 가보지도 않은 곳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했다.

샤머니즘을 좋아하는 회사 동료에게 운을 띄우니 단번에 날을 잡자는 답이 돌아왔다. 맛집을 찾아가고자 했으면 보름이 지나도 대답지 않을 사람인데 답이 빨랐다.

전화 예약을 잡고(나중에 알았지만, 문자로 예약할 수 있다고 했다) 동료와 날을 맞춰 이른 퇴근을 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두 시간여 후에 도착한 철학관은 마치 여느 상담소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잘 정돈된 책상과 테이블, 그림 액자 몇 개가 걸려있는 사무실에 차분한 인상의 여성분이 웃는 낯으로 반겨주었다.

“누구부터 하실까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엄마에게 물어 알아본 탄생 시까지 꼼꼼히 읊어냈다. 그 뒤로는 내 신상이 고스란히 적힌 종이 위로 알 수 없는 획을 가진 글자들이 날아다닌다. 종이에서 펜 끝이 떨어짐과 함께 웃는 낯이 의미심장했다.

“본인의 직업은 회사원. 자, 그러면 그냥 쭉 회사원이요.”

“네, 지금까지는 쭉 회사원이었어요.”

목구멍에서 침이 꼴딱 넘어갔다.

“그러니까 다음에도 저건 안 되세요. 그냥 월급 생활하시는 분으로 사셔야 해요.”

아아. 그러니까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도 쭉 사업 쪽으로는 꿈도 꾸지 말라는 거다.


시작부터 강펀치로 타격을 받고 어질어질한 마음으로 삼십여 분간 경청했다. 반은 알아듣고 나머지는 되물어 답변받았지만 결국엔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나와야 했다.

과거를 되짚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순탄하게 살았을 거라고 했다. 돌아보면 그런 것도 같아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없었을 리 없지만 사람을 잃은 것이 아닌 이상 지난 것은 그대로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앞날이었다.

올해에 이동수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멀리는 아닐 거라고도 했다. 그동안이 뿌리 없이 물에 떠다니듯 흔들렸다고 하면 이제는 뿌리를 제대로 내리게 될 거라고도 했다.

회사는 괜찮을 것 같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했다. 그건 알 수가 없다고.


회사는 타고난 사주가 없어서 그런 걸까.


멍청해진 머리를 흔들며 생각했다.

회사의 흥망을 알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내 뿌리는요?


가까운 곳으로 간다던 내 이동수는요? 




함께 간 동료는 준비성도 기특하게 워치를 통해 녹음하고 철학관을 나서면서는 그걸 문서로 옮겨 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낯선 역사 앞 치킨집에 앉아 맥주를 들이켜며 긴가민가 술렁이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도 문을 닫진 않는다는 거 아닐까요?”

회사 동료는 몇 달 후에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고 그 결정을 통해 멀리 이동할 거라고 들은 상태였다. 능력 있는 사람이니 무엇을 한다고 들었대도 놀랍진 않겠지만 멀리라는 말은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음, 뭐 그래도 올해 우리 사주가 되게 나쁜 것 같진 않다.

포털에 떠도는 흥미 위주인 것을 제외하고 제대로는 처음 보는 것이라 사주에 돈이 없어 끼니를 굶게 된다, 열악한 상황에 부닥쳐 정신이 피폐해진다 등의 내용도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진 않았으니 괜찮다는 아닐지 싶었다.

김이 오르는 치킨을 입에 넣으며 돌이켜보는데 우습게도 좋은 말들만 떠올랐다.

그렇게 까탈스럽지 않을 인생이니 하고 싶은 것은 마음 갈 때 언제라도 시도하면 된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 새총 하나 없이 서 있는 것 같았지만 그렇더래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총알이 알아서 피해줄 거라는 무모한 자신감조차 차올랐다.

희망을 크게 피우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지지대를 설치해 줘야 했다.


비조차 추적추적 내리는 날, 이 먼 곳에 와있는 이유가 누군가 내게 왜 이렇게 근거 없이 희망적이냐고 물을 때 내밀 지지대를 사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은 괜찮아졌다.



그리고 지난봄, 나는 3층이었던 사무실을 11층으로 이전했고 동료는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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